이미 불가역 구간에 들어섰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우리의 역량이 결정한다

[칼럼] 주수호 미래의료포럼 대표·전 대한의사협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전공의가 병원을 사퇴하고 의과대학 학생들이 휴학계를 제출한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일각에서는 지금이라도 의대생, 전공의들이 돌아오면 지난 2월의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전공의가 돌아오고 의대생들이 돌아온다고 한들 이들이 정상적으로 승급해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의사고시를 치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즉, 우리는 이미 불가역 구간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이제 그 무슨 방법을 써도 다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정부는 2000명 증원과 함께 필수의료패키지를 발표했는데 학생 전공의를 겁박하며 2000명 증원을 고수하고 필수의료패키지를 단계적으로 진행시키면서 전혀 양보할 뜻이 없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제 이 사태는 누군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손을 들어야 종료가 되는 엘리전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재 투쟁의 주축인 전공의들은 2020년 학생 때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에 휴학투쟁으로 맞섰던 세대다. 학생때부터 이미 정부와의 투쟁에 학습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향후 이들이 의료계를 이끌어가는 중추세대가 될 때까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할 것이라는 것이 예측되는 대목이다. 
 
이제까지 의사와 정부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신뢰관계가 깨져서 발생한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제도나 정책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도구에 의해서 선과 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정부)의 의도에 의해서 선과 악이 결정되는 것이다. 칼이 흉기도 되고 이기가 되는 것은 칼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칼을 쓰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정부는 의사들, 의료계를 정부 정책이나 의료 시스템의 주요 파트너로 여긴 적이 없었다. 의료계를 서로 존중하는 파트너로 여기는 대신 정부 정책을 하청 받는 하청업자 취급을 한 것은 바로 정부였다. 사적인 계약관계라면 갑질이라고 비난 받았을 수많은 행태들이 계약 당사자가 정부라는 이유로 다 무마되고, 그러한 불합리에 저항하는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매도되고 욕받이가 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정부가 의료계를 하청업자 취급하는 것을 벗어 던지고 의료 시스템의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한 정부가 당근 몇 개 던져주면 받아야 한다는 식의 섣부른 협상론은 합리성을 얻기도 어렵고 더구나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사직 및 휴학을 한 후배들 앞에서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의약분업 때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이 항복선언을 했다가 조직력이 와해되자마자 법까지 제정하며 주었던 것을 모조리 다시 빼앗아 갔던 경험이 있다. 
 
우리는 이미 불가역 구간에 들어섰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이제 우리가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는 순수하게 우리 내부의 역량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의료계의 상황은 사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요즘 의료계에서 언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것은 의사협회가 아니라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에서 서울대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크고 2000명 대란의 시발점이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서울대 비대위가 해야 할 일은 외부 환자단체들을 불러들이고 용산 참모를 불러들여서 공개적인 토론회나 개최할 시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의료계 내부 인사들을 불러들여 왜 이 사태가 생겼는지, 그리고 현재 의료계의 정확한 실태가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특히 여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울대 교수의 ‘의사 연봉 4억설’과 ‘의사들이 돈을 좇아 필수과를 대거 탈출하며 개원가로 몰려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서 서울대 쪽에서 공개적인 반박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의협 집행부도 마찬가지다. 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종교계 인사들을 만나고 다닐 것이 아니라 의료계 내부의 인사들이나 산하단체장들과 폭넓은 교감을 가지면서 통일된 의견, 통일된 행동 양식을 이끌어 내기 위해 내부 의견을 취합하고 토론하고 격론하며 공통의 아젠다를 이끌어 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환란에 빠진 의료계를 구원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회장의 역할’은 사라지고 제자인 학생, 후배인 전공의의 투쟁을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됐다. 
 
이 사태가 내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올해와 달리 신규 면허자 공급이 중단되고 전문의 배출이 전면 중단될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의사 공급이 중단되고 전문의 공급이 중단되는 것은 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쉽게 예측할 수도 없다. 다만 이제까지의 정부 행태로 볼 때 정부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 무자비한 탄압의 칼을 휘두를 것이란 것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이미 불가역 구간에 들어섰으니 우리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의협의 리더십이 더욱더 절실한 상황이다. 
 
활동의사 11만명이 넘는 조직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정상이다. 그 다양한 목소리들을 한데 엮어서 공통의 아젠다, 공통의 목표를 만들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조율하고 정렬해야 하는 것은 회장의 역할이다. 이제라도 의협은 제대로 된 강력한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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