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 진료거부금지 삭제해야…부당 진료 요구나 의사 폭행 원인이 될 수도

의료인에게 극도로 강화된 직업윤리, 안전한 진료환경에 악영향…최소한의 진료거부권 인정을

[칼럼] 이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의료인이 환자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구체화해 의료법에 명시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보건복지부 김명연 국회의원(자유한국당)로부터 대표발의됐다. 폭행, 난동 등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던 열악한 의료현장이 사회적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심지어 환자의 피습에 의해 의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비로소 의료인의 안전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이번 개정안은 의료인이 건강이 악화돼 진료할 수 없는 경우, 시설이 부족하거나 난이도가 높아 진료할 수 없는 경우, 환자가 부당한 진료를 요청하거나 진료를 방해하는 경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필요한 경우 등 의료인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열거하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이라 이런 것까지 법률에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사실상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진료에 임해야 했던 의료인의 숙명과 그동안 진료거부금지 규정이 얼마나 의료인을 옥죄고 있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가 의료법에 구체화되고 개정안이 통과되면 안전한 진료환경이 보장될까. 안타깝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료인으로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진료거부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으며,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믿고 진료를 거부하더라도 환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여전히 그 정당성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행 의료법 체계 내에서 안전한 진료환경 확보 의무는 오롯이 의료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의료인에게만 극도로 강화된 직업윤리, 진료거부금지 규정
 
진료거부금지를 규정하는 의료법 제15조제1항을 살펴보자.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이를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진료거부금지 의무는 보건의료기본법, 응급의료법, 건강보험법, 의료급여법 등에도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다보니 과하다 싶을 정도이며, 각 법률 간 체계적인 해석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의료법에서 의료인에게 진료거부금지 의무를 강제하고, 나아가 위반 시 형사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어떠한 사상이나 법문화에 기초하는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의료인의 직업윤리에서 찾기도 하며 독점적 면허에 내재된 의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왜 유독 의료인에게만 이처럼 극도로 강화된 직업윤리가 강제돼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람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의료전문가의 당연한 사회적 책무라면, 그 책무에는 진료가 가능한 상황인지 불가능한 상황인지 판단할 권한이 당연히 전제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 현실에서는 의료인이 진료거부만으로 처벌받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료거부의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진료를 지연하거나 전원을 지연하는 것과 같이 의료인의 부작위 또는 과실에 의해 환자가 피해를 입은 경우, 또는 의료기관이 의학적 판단 하에 환자에게 퇴원을 요구한 경우 등에 있어 부차적으로 검토될 뿐이다.
 
현실에서 진료거부금지 규정은 상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환자 측에서 이 조항을 근거로 의료인에게 부당한 진료를 요구하거나 폭행을 일삼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따라서 최소한 진료거부에 대한 처벌조항만큼은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외에서도 의료인의 진료거부 가능, 자유 계약의 형태

 
해외에도 진료거부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례가 있을까.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에서는 진료거부의 문제를 전문가단체의 자율규제 또는 직업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계약자유의 원칙 아래 의료인은 진료를 거부할 수 있으나, 이로 인해 환자가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의 경우 의사법에서 진료거부금지를 규정하고 있으나, 처벌조항이 없어 선언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미국의 경우 응급의료와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경제적 사유 또는 차별적 사유로 응급환자의 진료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한다. 즉 일반적인 상황에서 진료거부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경우는 없으며, 응급의료 또는 공공의료와 같이 국가의 책임이 요구되는 영역에서는 일정한 조건 하에 강화된 진료의무가 요구되기도 한다.
 
의료계약은 원칙적으로 계약 자유의 원칙이 적용되며, 환자에게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있듯이 의사에게도 진료에 협조적인 환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이러한 인식을 의료인과 환자의 대립관계로 곡해할 필요는 없다.
 
의료인은 부당한 또는 불필요한 진료요청을 거부하고 보다 절실한 환자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선량한 환자는 안전한 진료환경 내에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진료거부 또는 거부 불가 사유 구체화하고 안전한 진료환경 구축을

 
의료인의 진료거부를 허용하면 의료인이 무분별하게 진료를 거부해 환자가 필요한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을까. 이는 의료인의 직업윤리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의료전문가 단체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의료전문가 단체는 의료인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사유 또는 거부할 수 없는 사유 등을 구체화해 회원들이 무분별하게 진료를 거부하지 않도록 가이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무분별하게 진료를 거부함으로써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회원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의료 선진국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취하고 있다.
 
최근 의료계약 관계에서 환자의 권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의료인의 설명의무 및 환자안전 활동이 강화됐고, 환자는 수혈 또는 연명치료 등을 거부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해 의료인의 권리 또는 안전한 진료환경에 대한 논의는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진료거부금지에 관한 논의는 안전한 진료환경을 구축하고, 선진적 의료계약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첫 걸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료법과 국민건강보험법 테두리에 묶여 있는 대한민국 의사들로서는 그 삶이 매우 고달프다. 의료법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진료에 임해야 하는 반면, 이에 대한 보상체계는 건강보험법이 정하는 살인적 저수가의 틀에 묶어 놓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비현실적 규격진료를 강요한다.
 
그동안 진료거부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으로 인해 의료인과 환자가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었다. 이제는 엄격한 전문직 윤리를 바탕으로 한 의료전문가와 성숙된 환자 간의 협력적 관계 형성을 우선순위로 선진 의료문화의 정착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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