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등장한 환자 보호자들은 말로는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지만, 결국 바라는 것은 '돈' 이다. 원가에도 못미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쉽게 '억'대를 요구한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니? #6.
" 환자의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의사의 진심어린 사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뻔하디 뻔한 레파토리다.
대개는 서글픈 음악이 깔리면서 환자 또는 보호자의 눈물을 보이는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이어지는 기자 또는 리포터의 멘트.
" 환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의사들의 각성이 요구됩니다. "
자극적인 제목과
일방적인 주장.
의사의 해명은 모자이크에 음성변조를 한 후
(주로 카메라를 삐딱하게 놓아서 담당의사가 인격적으로 삐딱해 보이도록 유도한다. )
싸가지 없어 보이는 장면만을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공분을 유도하고
의사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한다.
방송이 끝나고 나면 해당 프로그램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의사를 비난하는 댓글이 봇물을 이루고
청와대의 청원 게시판에는 의사를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뜬다.
이제...
앞, 뒤도 보지 않고
반론도 듣지 않는 마녀사냥이 완성된다.
일단, 여론이 형성되고 나면
그 이후 재판을 통해 그 의사가 무죄가 선고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심정적 유죄를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무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추적보도도 하지 않는다.)
그럼, 방송을 타지 않는 경우는 어떨까?
나는 surgeon이라서 수술의 경우에 대해서 언급한다.
수술 전에는 항상 마취와 수술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합병증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는다.
대부분에 있어 발생가능한 합병증은
매우 적은 확률(대개는 십만명 당 몇 명 꼴이다.)로
'발생할 수' 도 있는 것이다.
분명히 수술전에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인이나 보호자가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합병증이나 부작용이 발생하면
당장에 의사는 죽일놈이 된다.
아마도 많은 의사 페친들께서도 당해보셨을 일이리라.
항생제에 대한 skin test를 시행하여
특이소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항생제 투여 후에 급성 과민반응이 나타나는 환자들이 있다.
가볍게는 온몸에 rash(발진)나 urticaria(두드러기)가 발생하기도 하고
심할 경우 respiration difficulty(호흡곤란)이나
hypotension(혈압저하)가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비단 항생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약물에 있어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자마자
옆에 있던 보호자는 핸드폰을 돌려댄다.
바로 의사 앞에서 말이다...
" 아빠!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놔서 엄마가 이상해. "
" 언니!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놔서 지금 아빠가 돌아가시게 생겼어, 어서 빨리 좀 와봐!! 빨리빨리..."
순간 주사를 '잘못' 놨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공식적으로 가족들끼리의 대화에
의사가 껴들어 갈 여지가 없으니
의사는 환자에게 적절한 처치를 하며 상태를 지켜보게 되는데
이 경우 보호자의 확신은 더 굳어져간다.
대개의 경우 일시적인 과민반응은 적절한 치료로 사라지고
(많은 경우 생리식염수만 빨리줘도 호전된다.)
다른 보호자가 도착할 때 쯤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환자는 호전되지만
의사에 대한 불신은 이미 한계점을 넘었다.
환자나 보호자와의 라뽀(rapport)를 중시하는 의사의 경우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 환자분에게 항생제 반응검사도 했지만
특이소견이 없어서 항생제를 투여했던 것인데
드물게 이런 환자분들이 있는 것은
의사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이제 과민반응은 없어졌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그러나 보호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는 무너지고 그걸로 끝이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이럴진대...
환자가 사망한 경우는 어떠랴...
의사에게 잘못이 있건 없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의사의 '잘못인정'
또는 그와 유사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과' 이다.
그러나...
'잘못인정' 이나 '사과' 는
해결의 종착점이 아닌 시발점이 된다.
무슨 말이냐고?
잘못을 했든 안 했든
'잘못인정' 이나 '사과'를 하게 되면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랬던' 보호자들은 2선으로 물러난다.
이후 나타나는 보호자들은 그동안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
조카
형부
매제
삼촌
사촌
심지어 아는 언니까지...
" 잘못을 인정하셨으니 배상을 하셔야죠. "
" 잘못을 인정한다는 각서를 쓰세요. "
결국 다 돈문제로 귀결된다.
조카, 형부, 매제, 삼촌, 사촌, 아는 언니는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일종의 '해결사'이다.
이럴때 순진하게
" 진심어린 사과만 바란다면서요? "
이런 말이 통할 것 같나?
내가 아는 사람중에 어떤 판사가 그러더군...
" 잘못을 했든 안 했든,
네 과실이 있든 없든,
절대로 인정하거나 사과해서는 안된다.
그럼 그걸로 끝이야.
각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절대로 써주면 안돼... "
하이에나...
이 이상 더 적절한 표현은 찾기 힘들다.
때로는 변호사도 그 무리에 동참한다.
(변호사야 뭐 대놓고 돈 때문이니 그렇다 치고...)
말로는 '진심어린 사과' 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100%,
아니 200% 장담하건대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절대로...
의료혜택은 철저히 사회주의이기를 바라면서
배상은 철저히 자본주의기를 바라는 이중 잣대.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돈' 이다.
한번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돈을 포기할래,
아니면 진심어린 사과 대신에 돈을 받을래? "
그들은 뭘 선택할 것 같나?
물어보는 내가 바보다.
누구든 좋다.
'진심어린 사과' 이후에 돈을 요구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면
case report 해 주기를 진심으로 앙망한다.
원가에도 못미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쉽게 다 '억' 이다.
일단 세게 불러야 일부라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선의로 행한 진료에
오진이라고 하여
매우 희귀한 케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사상 배상을 받고도
형사상 구속을 하고
면허마저도 박탈하고 싶어한다.
어짜피 일반적인 국민감정을 돌이키기는 어려울테니
리스크에 대한 관리비용이라도 책정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 리스크는 의사인 니가 감당하고
배상도 니가 다 해라... "
미쳤냐?
우리가 약 먹었냐?
깎아달라는 말이나 안해도 좀 살겠다.
무식하게 억지만 쓰지 않아도 그냥 의사 하겠다.
"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니? "
니네가 사람이 되려면...
이번 얘기 끝...
※’Antonio Yun의 진료실 이야기'의 저작권은 저자인 외과 전문의 엄윤 원장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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