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내 의학단체의 춘계 학술대회.
기자는 아침부터 부푼 꿈을 안고 학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최근 바이오벤처와 관련, 이 학회에서 흥미로운 얘기가 오갈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이 열리는 홀에 들어가자 유창한 영어가 들렸다.
학회의 첫 오프닝 세션답게 두 개의 홀을 합쳐서 그런지 좋은 발음이 더욱 울렸다.
연자는 전형적인 노년의 한국인 교수 외모였는데, 발음이 통상적인 그 세대의 것이 아니었다.
학회의 첫 세션인데도 분위기는 너무 많이 가라앉아있다.
얼핏 들리는 그의 강연 내용을 들으니, 이유를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미국에 건너가 현지에서 의사 면허증을 따고 수련을 받아 미국 의대 교수가 됐다는 연자.
그는 주어진 발표 시간을 힘들었던 미국 적응기, 친구들 얘기를 비롯한 소소한 그의 일상, 그의 정치관을 간접적으로 비친 얘기들로 채웠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가 이룬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문제는 이 강연이 학술대회 세션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주제와 상관없는 개인 역사를 쭈욱 읊은 것이다.
강연을 듣기 위해 아침부터 모인 청중 표정이 밝을 리 없다.
더군다나 이번 학회는 국제 학회와 조인트 심포지엄이어서 참석자는 내국인 반, 외국인 반이었다.
기자는 외국인의 반응이 유독 궁금해, 유심히 살펴봤다.
그 매너 좋다는 외국인도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을 했다.
다른 책을 보거나, 자거나,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거나…
강연은 더욱 늘어졌고, 이 상황을 '가장 참기 힘들었던' 한 청중이 일어나 소리쳤다.
한국식 영어 발음 덕분에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니 여보세요. 지금 말씀하시는 게 주제와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주제 제목을 확인해 보세요.
여긴 지금 조인트 심포지엄으로 몇 개의 학회가 합동으로 모여 있다고요.
제발 주제와 맞는 얘기를 해주세요."
그녀의 영어 발음과 뉘앙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녀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부 외국인 청중은 그녀의 표현에 웃음을 참고 있었다.
연자는 당황하지 않았고,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기자는 강연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기자의 발걸음 뒤로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그가 청중 모두가 원하는 걸 들어준 것이다.
의사들은 외래 수입이나 가족과의 주말 여가를 포기하면서까지 학회에 간다.
지방 의사들은 더 큰 맘을 먹어야 학회에 올 수 있다.
연자들은 그런 고민을 한 번이라도 할까?
그런 교수에게 수업받을 의대생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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