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간호사들에 손 내민 전공의들이 의료계에 던지는 '메시지'

간호법 갈등 첨예한 가운데 간호사 등 처우 개선 주장…보건의료인 함께해야 목소리 힘 받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When they go low, we go high.”(그들이 저급하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있게 간다)

지난 2016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남긴 말이다.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과 극명하게 대조된 미셸 오바마의 발언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최근 간호법을 둘러싼 보건의료계의 갈등을 보며 새삼스레 이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 대한간호협회(간협)는 홈페이지를 의사들을 비하하는 문구로 가득 채웠다. 의협을 향해 의사단체가 아니라 ‘배후조종사’ ‘약자 코스프레 전문가’ ‘파업지도사’라고 조롱했다.

그전까지 간호법 논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던 의사들마저도 해당 문구들에 대해선 “간협이 선을 넘었다”며 분노했다.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의료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저버린 언사라는 지적이었다.

반면 최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보여주는 행보는 간협의 행보와 대조되며 이목을 끌고 있다. 대전협은 전국 수련병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 의사(전공의)들로 구성된 단체다.

이들은 지난 13일 병원에서 일하는 정신건강심리임상사 수련생들이 주 100시간이 넘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한 언론 보도에 대해 이들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대전협은 불과 이틀 전에도 근무환경이 열악한 젊은 간호사들의 처우 개선 방안을 담은 입장문을 낸 데 이어 병원에서 종사하는 타 직역 동료들의 아픔에 또 다시 공감을 표한 것이다. 다만 대전협은 간호법에 대해서는 기성 간호사들만의 이득을 위한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간협, 의사들 비하 논란…병원 타 직역 어려움에 공감 표한 대전협의 '품격'

전공의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단체인 대전협이 타 직역의 처우 개선을 주장하는 건 이례적인 모습이다. 누군가는 당장 의사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할 상황인데 남 걱정하고 있을 때냐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전협은 무턱대고 타 직역의 처우 개선만 주장한 게 아니다. 대신 병원 내 타 직역의 아픔을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고 공감하면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대전협은 입장문에서 “우리는 병원 내 모든 직역의 종사자들을 동료로 존중하며, 병원 종사자 처우 개선을 위해 하나의 팀으로 서로가 협력해 나가야 하는 관계임을 밝힌다”며 “전공의를 비롯한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방사선사 등 병원 내 다양한 직역 종사자가 과로하고 아파도 쉴 수 없는 환경이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대전협은 간호사들이 초과 근무에 대한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며, 전공의가 주 100시간이 넘는 시간을 일하면서도 주 80시간에 대한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만 받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과도한 부분을 꼬집으면서는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는 5명 이내로 ,전공의 1인당 환자 수는 15명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런 불합리한 부분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인들이 합심해 의료 지출에 인색한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선진국에 못 미치는 수준의 의료 지출(8%)로 보건의료인들에게 질 좋은 의료체계를 유지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며 “정부가 책임 있게 보건재정을 확충해 처우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동료 보건의료인으로 모두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간협이 그랬듯 상대를 배척하고 끌어내리는 대신 끌어안고 손 잡음으로써 모두가 윈-윈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보건의료계 '생채기' 남길 간호법 갈등…함께 목소리 낼 때 국민도 귀 기울일 것

대전협의 최근 행보는 의료계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간호법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번 갈등을 여전히 보건의료 직역 간 ‘밥그릇’ 싸움으로 보고 있을 공산이 크다.
 
간호법과 관련된 양측 주장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의료인들이 ‘밥그릇’을 놓고 서로를 헐뜯고 싸우는듯한 모습이 국민들에게 긍정적으로 비춰질리 만무하다.
 
결론이 어떻게 되든 이번 싸움이 병원 종사자 모두에게 큰 생채기를 남기게 될 것도 분명하다. 환자 치료를 위해 합심해야 할 이들이 마음 속으로는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한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것이다.
 
물론 때로는 부정적 여론을 감수하고서라도 싸워야 할 순간도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라 하더라도 의견이 달라 대립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주위로부터 긍정적 여론을 얻고, 파국도 막으려면 한 손에 투쟁 깃발을 들고 있더라도 다른 한 손으로는 언제든 상대의 손을 잡을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상대가 앞으로도 손발을 맞춰 함께 일해야 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 열린 대전협 임시대의원 총회에서 파업 안건이 정족수 미달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이를 놓고 의료계 일각에서는 지난 2020년 의료계 총파업의 선봉에 섰던 전공의들이 이번에는 파업에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뒷말도 나오고 있다.
 
물론 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의 힘으로 간호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파업은 불가피해 보인다. 거기에 전공의들이 힘을 보태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대전협이 극한 대립의 간호법 정국 속에서도 간호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순간만큼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대전협은 의사를 비하하는 간협을 향해 같이 막말을 내뱉는 쉬운 방법 대신 ‘품격’있게 가는 방법을 택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든 선택이고, 의료계 내부에서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의사들이 혼자일 때보다 간호사들을 포함한 보건의료인들의 손을 잡고 함께 목소리를 낼 때 국민들이 그 목소리에 더 귀기울인다는 점이다. 동료 보건의료인들로부터 진심어린 존경과 존중도 뒤따를 것이다. 대전협의 최근 행보가 향후 보건의료계의 어떤 바람을 불러올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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