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부검 내려놓은 법의학자의 호소 “피만 뽑게 해달라”

[인터뷰] 대한법의학회 김장한 회장 “이대로는 법의학자 씨 말라…행정검시 강화하고 법의관에 권한 줘야”

대한법의학회 김장한 회장.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김장한 교수(대한법의학회 회장·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교수)는 2003년부터 지난 20여년 간 해왔던 부검을 최근 내려놓기로 했다. 나이가 들며 과거보다 부검감정서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게 되면서다.
 
“부검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더라. 예전에는 부검감정서 5건 쓰는데 열심히 하면 3일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는 4~5일이 걸려서 감정서 쓰느라 다른 일에도 차질이 생기는 상황이 됐다. 게다가 부검을 해봤자 수익적으로 크게 남는 것도 없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검을 그만두기로 했지만 법의학에 대한 애정이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 법. 최근 메디게이트뉴스와 만난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죽음을 다루는 법의관의 권한이 부족하고 관련 시스템도 부재하다며 “국민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 나라의 국격을 보여준단 점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일갈했다.
 
그는 선진국 대비 낮은 부검률을 끌어올리는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유명무실한 행정검시 제도를 재정비하고 시체 검안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원인 미상의 시신들을 안치할 공시소(공공영안실)를 설치하고, 법의관들에게 시체로부터 혈액 채취 등의 권한을 주고 근무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그것이 시체를 온전히 빠르게 돌려받길 원하는 유족의 바람에 부응하면서도, 후학이 줄어들어가는 법의학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병원에서 사망할 경우 행정 처리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다. 하지만 병원 밖 다른 장소에서 사망한 경우엔 일이 복잡해진다. 유족들은 사망진단서를 떼기 위해 병원을 찾아야 하고.시신은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진다. 사망 원인이 불명확할 시엔 경찰의 판단 하에 사법 부검 의뢰가 이뤄질 수도 있다. 부검을 위해선 검찰이 법원에 영장을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추가로 시일이 소요된다.
 
이 과정에서 애가 타는 건 유족들이다. 김 교수는 행정검시 제도를 강화하고 법의관에게 간단한 권한만 몇 가지 주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행정검시가 사법 부검 이전에 관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시소를 마련하고 법의관에게 사망자의 생전 의무기록 확인, CT 촬영, 혈액 채취 등을 허용해주면 부검까지 가지 않고 사망원인에 진단명을 적어넣을 수 있다”며 “최소한 혈액 채취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이어 “공시소를 운영하면 고독사나 대량재해로 원인 미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그리로 데리고 오면 된다. 그러면 직원이 밤새 사건 정리를 하고 의무기록도 미리 찾아놓고 혈액을 채취해 독극물 검사를 맡겨놓는 거다. 법의관은 아침에 와서 그걸 보고 검안을 하고 정리를 해주면 사망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 국내에는 법의학자가 50여명에 불과하다. 법의학을 하려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금, 김 교수는 제도 개선이 시급히 이뤄지지 않으면 조만간 법의학의 씨가 마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법의관들에게 권한을 주고 행정검시를 강화하는 게 기존엔 사법부검 외에 다른 영역이 없다시피했던 법의학 분야의 파이를 늘리는 방안도 될 것이라고 했다. 법의학으로 진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행정검시 강화는 필수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행정검시 제도를 서울에서부터 시작하고, 인적 자원이 늘면 시행 지역을 넓혀가자며 끝으로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과거에 선배들은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가져와서 법의관법을 만들려고 했다. 당연히 검찰에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공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영장청구권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영장을 청구하기 전에 행정검시를 하고 그 과정에서 혈액만이라도 뽑게 해달라는 거다.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말 소박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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