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은 두 직역 모두의 면허취득이 원칙, 대법원 판결은 역행...의사법 제정과 의사 자율규제 필요
[신년 칼럼] 안덕선 전 의협 의료정책연구소장 세계의학교육연합회(WFME) 부회장
[메디게이트뉴스] 의료에 관한 법률의 현대적인 모습 중의 하나는 의료직을 환자와 사회의 안전을 위한 규제의 대상으로 보고 전문직규제(regulated profession)라는 명제 하에 각 의료 전문직별로 각 각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의사는 의사법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종별로 법을 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직역에 대한 정의와 영역을 명시하고 직역별로 법적으로 허용된 범위내에서 의료를 하도록 해서 환자와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료직역 간의 갈등(inter-professional conflict)에 대한 문제를 사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달리 해석하자면 현대적 의료법 체계를 갖는 선진국에서는 법으로 각 직역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을 각각 직역에 맞게 제정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즉 각 전문직역은 법의 효력을 갖는 공공 전문직 기구(regulator)에 의해 제정된 전문직업성을 준수해야 하고, 수준(standards) 미달의 의료나 행동은 자율 기구에 의한 처분을 내릴 수 있게 했다.
미국 의사면허기구연합체(FSMB, Federation for State Medical Boards)의 표현을 빌리면 의료에 관한 법은 모범적 의료를 위한 규제로 법적 효력을 지니는 규범을 만들고 면허와 자격, 그리고 행정처분 등에 필요한 조사와 징계 등 의료행위의 법적 조항을 명확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문직 스스로 모범적 의료의 실천을 위한 수(기)준(standards) 와 구체적 의료 활동에 대한 기대치를 명확히 하고 면허 소지자에게 지침을 제공하는 개발 정책도 포함된다.
궁극적인 목표는 의료의 전문적 실천을 육성하고 비전문적이고 부적절하며 무능한(incompetent) 의료로부터 대중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韓)의사의 초음파 사용의 문제와 이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는 현재 70개의 의사 전문직을 위한 자율기구(state medical board)가 존재한다. 이렇게 많은 지역별 전문직 자율기구인 의사면허기구가 존재하는 이유는 의료관련 법률의 전문직규제(regualted profession)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의사는 대표적인 자유업으로 회자돼 왔으나 법은 의사의 자유에 대해 세밀한 준비, 술기, 학습, 사회 보호 등의 조건과 제약을 자율적으로 집행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의료의 형사범죄화와 의사의 전문직업성에 대한 법적 판단
우리나라는 현대적인 자율규제에 관한 개념이 의사나 국민 그리고 정부, 법원 모두가 아직 낯설은 나라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국가는 이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 스스로 조건과 제약을 위한 자율에 대한 인식 부족이나 거부감은 우리나라가 갖는 서양의학에 대한 사회,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스스로 자율 규제권을 갖고있는 법조계조차 법치만능주의에 빠져 다른 전문직인 의사 전문직의 자율에 대해 더욱 심각한 이해 부족 현상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런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의 결과가 보여주는 것이 과도한 의료의 형사범죄화와 의사의 전문직업성에 대한 법적 판단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바로 의료계가 요구하는 사법개혁의 이유이기도 하다.
남편이 한의사로 요양병원을 개원하고 있는 대법관이 관여한 한의사의 초음파기기 사용에 관한 사건에서 재판부는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금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의사의 초음파에 의한 진단 보조수단은 면허된 것 이외 의료행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과거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뒤집는 것으로 한의과대학의 의료기기 사용관련 교육과정이 지속적으로 강화됐다는 이유를 달고 있다. 아울러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이 국민 선택권을 합리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 10조에 근거해 타당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대 의견을 제시한 대법관은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이 우리나라의 서양의학과 한방의 이원적 의료체계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의과대학의 교육 정도를 감안 했을 때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한의사가 초음파 기기를 사용하면 오진 등 보건위생상 위해 발생 소지가 높은 만큼,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 여부는 제도와 입법적 해결이 더 필요하다고 분명히 했다.
한방 초음파기기 사용은 한방의 존재 사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실제로 선진국은 두 직역의 영역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두 직역 모두의 면허취득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반대 의견을 주장한 대법원 판사들과 같이 이미 선진국은 현대적 전문직 규제법을 제정하고 모든 의료직에 대한 직역과 허용된 의료활동을 규정하고 있다.
캐나다는 중국전통의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한(漢)의사를 전문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한(漢)의사는 영어로 'doctor'이나 'physician'은 아니다. 캐나다의 의료 관련법은 한의사의 초음파 사용에 관한 문제는 성립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캐나다 법에 의한 의료활동은 모두 14가지로 크게 구분되고, 이중 2가지 활동이 한(漢)의사에게 허용(authorized acts)되고 있다. 첫째는 침술을 목적으로 진피 아래와 점막 표면 아래의 조직에 시술하는 것과 둘째로 중국 전통 의학 기술을 사용해 개인의 증상의 원인으로 신체 시스템 장애를 식별하는 전통 중국 의학 진단을 전달하는 것이다. 법으로 한의사의 진단기법은 시진, 청진과 후각, 문진, 촉진의 4가지 방법론에 국한한다. 한방이론과 실제에서 진단 보조로 초음파기기 사용은 한방의 존재 사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허가된 활동 영역(scope of practice)을 위배한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보며 법조계의 현대적인 의료관련 법에 대한 이해부족과 정부의 현대적인 전문직 관리에 대한 무지가 결합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국제적 추세의 의료 관련 법 제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 실망과 좌절감을 금할 수 없다.
한(韓)의학 교육과정에 의료기기 분야가 강화됐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일까. 의과대학 졸업생도 별도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잘 읽을 수 없는 것을 한의대에 초음파술이 노출됐다고 해서 교육 강화가 됐다는 반교육적 판단이 터무니없기만 하다.
판결 비전문성 의구심과 그저 법망 빠져나가식 판결에 허탈한 마음 뿐
향후 어떤 직종도 면허 취득 전 교육에 의료기기 분야 교육과정의 강화를 보여주는 분야는 직역과 무관하게 허용되는 것인가. 판결의 비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수 밖에 없다.
구체적 의료활동을 법으로 명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특정 의료활동이 의료법 위반이 아니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의료법 위반을 빠져나가기 위한 변호사의 변론 같은 주장이다. ‘무엇을 할 수 없다’라는 법조항이 없다고 해서 무엇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대법원의 판단에 그저 기가 찰 뿐이다. 두 개의 분리된 사안이 하나의 판단으로 귀결되는 모습인데, 대법원 스스로 법망을 피해가는 방법을 잘 제시하고 있다.
사회의 중심가치를 보존하는 최고의 기관인 대법원 위치에서 상식에 반하는 놀라운 판결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판결이 가장 진보적인 판단인지, 아니면 비전문성에 근거한 어처구니없는 판결인지 허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선진국은 환자와 사회의 안전을 위한 국민의 선택권 보장을 위해서 직역별 직무의 정리를 하나, 우리나라는 반대로 직역별 직역 경계를 허무는 것이 중심가치로 변모하고 있다. 개인적 의견이나 재판부 자체의 구성에 심각한 제척사유가 있어 보인다. 이해갈등 관계에 놓인 신분이 제척사유에 해당된다면 재심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재판부 구성의 법적인 하자는 없다고 강변할 것이다. 법대로 살자는 취지에 동감하나 전문성을 요하는 의료관련 법이 허술해 법치만능이 아닌, 허술한 시대착오적인 법에 의한 부작용이 마치 주기능처럼 보이고 있다.
이런 법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전문직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법적 지위의 자율기구의 설립과 전문적 판단의 존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법원이 앞장서서 이에 반하는 후진적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현대적 의료규제,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판결을 기대한다
전문직 역사가 아직 선진 민주화 국가보다 짧은 우리나라에서 전문직 내부나 이해당사자를 포함한 전문직 외부 영역 모두 전문직 관리에 대해 미숙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오래 전에도 독립된 의사법 제정을 제기했으나 현상 유지와 다른 직역과의 갈등 우려로 내부와 외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간호법의 도전도 알고 보면 간호사법과 같은 위치의 주장이다. 의료직역 간의 갈등은 이제 대법원의 판결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현행 우리나라 의료법에는 아직도 직역에 대한 정의나 활동영역(scope of practice), 허가활동(authorized acts)에 대한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은 엉성한 법이다. 엉성한 틈새를 이용한 직역간 영역침투인 확장의료(expaded practice)를 시도할 가능성은 이제 상존하는 세상이 됐다. 현상 유지를 위한 수동적 자세에서 확실한 직역규제(regulated profession)를 위한 능동적 방안을 모색할 때가 됐다.
의사단체 스스로 이런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 조성과 입법활동 등이 부족했다고 자탄하기에는 현재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의사들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고 다시 확인해 주는 절망적 판결이다. 한의사의 초음파기기 사용으로 불거진 문제는 작은 물구멍이 댐을 터트리듯, 향후 의사직에 대한 엄청난 잠재적 위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하는 상황에서 의료계의 후폭풍이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 해결은 현대적 의료규제(medical regulation)도입이다. 하지만 의사단체의 체계적인 전략에 의한 장기간의 지속적 노력이 필요한 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씁쓸하고 착잡하고 답답한 마음은 ‘신이여, 제발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 아닌 푸념을 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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