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A씨는 몇 년 전 만취 상태에서 넘어지면서 실수로 지나가던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다.
그러자 그 여성은 불쾌감을 느꼈다며 A씨를 성추행으로 고소했다.
이 때문에 A씨는 벌금형이 확정됐고,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이하 아청법)' 적용을 받아 지난해부터 진료가 금지됐다.
A씨는 한 순간의 실수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A씨는 31일 메디게이트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진료실에서 불미스런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해 번화가에서 실수를 한 건데 아청법 적용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가 잘못을 한 것은 맞지만 정말 한 순간의 실수로 지금까지 해왔던 게 다 날아갔다"고 덧붙였다.
A씨는 헌법재판소가 31일 '성인'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에게 10년간 진료를 금지한 아청법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함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아청법 제56조 제1항 제12호는 아동·청소년, 성인 대상 성범죄로 형 또는 치료감호를 선고받아 형이 확정된 의료인은 10년간 의료기관을 운영하거나 병의원에 취업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헌재에 위헌확인 심판을 청구한 5명의 의사와 1명의 치과의사는 모두 성인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
이후 아청법 적용을 받아 의료행위가 금지되거나, 병원에서 해고되거나, 의료기관 개설을 포기하거나 운영중이던 병원을 폐업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아청법 해당 조항이 의료인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론 내렸다.
성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범행의 정도, 재범 위험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10년 동안 일률적으로 의료기관 취업을 금지하는 것은 과도한 제한이라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헌재는 "아동·청소년을 잠재적 성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의료기관의 윤리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공익인 것은 맞지만 이 사건 법률 조항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헌재는 "이러한 제한은 공익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청구인들에게 감내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므로 법익의 균형성 원칙에도 위반된다"면서 "이 사건 법률 조항은 청구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 한다"고 밝혔다.
의료계는 헌재 결정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의사협회 김주현 대변인은 "아동·청소년이 아닌 성인 대상 성범죄에 대해서도 범죄의 경중을 불문하고 무조건 10년간 개업·취업·노무 제공을 금지하는 불합리한 조치가 행해져 왔다"면서 "의료현장에서 뜻하지 않게 불이익을 당하는 의사들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 하겠다"고 강조했다.
경기도의사회는 "성범죄를 강력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아청법은 지나치게 의료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규제 기요틴 중 하나로 과도하게 속박하는 제도였다"면서 "아청법 조항의 위헌 판정을 적극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만 경기도의사회는 "앞으로 진료 중 발생하는 성범죄에 대해서는 강력한 내부 자정을 통해 의료 현장에 발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의사와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의료계 스스로 샤프롱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001년 11월 15일 공포한 의사윤리지침 제16조 제4항에 따르면 의사는 내진을 할 때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제3자의 입회 아래 시행해야 한다.
일명 샤프롱(chaperone) 제도를 의사윤리지침에 명시한 것이다.
샤프롱은 진료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추행이나 환자의 프라이버시 손상을 예방하기 위한 대표적인 장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사협회는 2006년 의사윤리지침을 개정하면서 샤프롱 조항을 삭제해 버렸다.
이명진 전 의료윤리연구회 회장은 "샤프롱은 의사와 환자를 모두 보호할 수 있는 장치"라면서 "의사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의사윤리지침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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