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임상 역량 가진 대한민국 의료..교육∙연구는 여전히 뒷전

[2022 대한의학회 학술대회] 위기 처한 아카데믹 메디신 구하자...의학회 비롯 유관 단체들 TFT 구성 뜻 모아

이화의대 권복규 교수, 서울의대 신좌섭 교수.

[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세계 최고 수준인 임상 영역과 달리 교육과 연구는 뒷전이 된 국내 의료계의 현실을 바로잡아야 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환자 진료는 물론이고 아카데믹 메디슨(Academic Medicine), 일명 학술의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화의대 권복규 교수는 16일 더케이호텔 서울에서 열린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연구·교육이 중심이 돼야 할 대학병원이 진료 기능에 치우친 현 상황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련병원들의 전공의 수요는 매년 배출되는 의대 졸업생을 상회한다”며 “문제는 과연 그런 병원들이 아카데믹 메디슨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고 있느냐 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이어 “이상적인 아카데믹 메디슨은 교육·연구가 주가 돼고 진료가 이를 지원하는 형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진료 비중이 가장 크다”며 “그나마 승진에 필요하니 교수들이 연구에 대한 압박은 느낀다. 결과적으로 교육이 가장 희생되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권 교수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부나 공적 기금 등을 통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아카데믹 메디슨은 공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학의 전승, 학술연구의 성과는 특정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만큼 정부가 지원에 나설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병원 인적·물적 자원의 상당 부분을 교육 수련과 학술연구로 돌려야 한다”며 “이를 위한 진료 수익 손실부분은 공적으로 보상 받아야 한다”며 “이게 안 되고 대학병원이 프랙티컬 메디슨과 같은 기준으로 취급되다 보니 아카데믹 메디슨의 위기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교육∙연구 도외시 하는 대학병원...의료계 한 목소리로 정부 지원 이끌어내야

서울의대 신좌섭 교수 역시 의학을 지탱하는 교육·연구·진료라는 세가지 축 중 진료의 비중이 커지며 아카데믹 메디슨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는 데 동의했다.

신 교수는 “1980년대 말부터 대기업들이 병원과 의대를 설립하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믹 메디슨의 역할을 넘어 프랙티컬 메디슨, 즉 개원가와 경쟁하게 됐다. 아카데믹 메디슨을 담당해야 할 기관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위기임과 동시에 아카데믹 메디슨의 활성화를 목표로 힘을 모을 적기임을 의미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선 교육·연구·진료와 관련된 기관 및 학회들이 화학적으로 끈끈하게 연합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의학회와 각 분과학회, 의대교수협의회, 전공의협회, 의대생협회, 수련병원, 의학한림원 등은 물론이고 참여와 공정이란 시대 정신을 감안해 시민과 환자들의 참여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먼저 일시적인 공통 사안을 중심으로 협력을 시작하되, 궁극적으론 장기간 임기가 보장된 연대사업 담당자들을 통해 협의구조를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선 각 조직 미션에 아카데믹 메디슨을 핵심 항목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학연구 시스템 총 사령탑 마련" "교수노조 등 의대 교수 정체성 문제 짚어야"

이어진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도 아카데믹 메디슨의 정착을 위해 다양한 제언들을 내놨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 한희철 이사장은 우선 의료계가 아카데믹 메디슨에 집중할 의지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의학연구 시스템을 진두지휘할 총사령탑이 필요하다고도 제안했다.

그는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 백신을 개발한 나라들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반면 정부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백신을 개발해내지 못 했다”며 “의료계 내부적으로 아카데믹 메디슨을 통해 의학의 범위를 넓혀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될지, 퍼스트 무버들을 빠르게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될 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미국의 국립보건원(NIH)과 같은 기관이 총괄하는 의학연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다수의 부처에서 관련 프로젝트를 산발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으론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고려의대 김병수 교수는 의대교수 노조, 공공임상교수제 등을 언급하며 아카데믹 메디슨을 해야 하는 의대 교수들의 정체성이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교수노조를 통해 교수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일면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과연 그것이 아카데미즘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싶다”고 의문을 표했다.

이어 “지방의료원에 전문의가 부족하다보니 이들을 지방거점대학의 초빙교수로 임용해 지방의료원에서 근무토록 하겠다는 제도도 나왔다”며 “이 두 사안을 보면 교수는 학문적 존재라기 보다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 자리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카데믹 메디슨에서 의대 교수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교육 성과 낸 교수들 인센티브" "아카데믹 메디슨 공론화 노력 필요"

연세의대 유대현 학장은 아카데믹 메디슨의 활성화를 위해 교육에 투신하는 교수들을 위한 인사제도 개편, 롤 모델이 될 연구자의 발굴 필요성 등을 제시했다.

그는 “어느 대학이나 진료를 많이 하거나, 논문을 많이 쓰면 혜택이 있는데 교육을 많이 했다고 보상을 주는 대학은 거의 없다”며 “교육에 시간을 더 할애하고 성과가 나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인사제도 개편이 이뤄지면 아카데믹 메디슨이 잘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피교육자들을 위해서는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교수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며 “연구를 잘 하면 금전적 보상, 명예 등을 얻을 수 있단 걸 보여줘야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한의학회 박형욱 법제이사는 아카데믹 메디슨의 중요성을 공론화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 이사는 “의료계에 여러 문제점들이 있지만 그것이 내부적 불만에 그쳐선 안 된다. 여러 매체 통해 국민의 목소리가 될 때 정부에서 제대로 논의해야하는 문제로 인식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공론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계가 사회와 환자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 내면화 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아카데믹 메디슨을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회와 환자를 걱정하고 있다는 게 신념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병원장들이 변화해야 가능" "유관단체 TFT 구성해 구체적 결과 도출"

대한의학회 안석균 고시이사는 아카데믹 메디슨 활성화를 위해선 대학병원 병원장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실적으로 대학병원장들이 바뀌지 않으면 의대와 대학병원에서 아카데믹 메디슨이 구현되긴 어렵다는 것이다.

안 이사는 “과거에 일각에서 인턴제도 폐지를 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당시 병원장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안다”며 “아카데믹 메디슨을 위한 조직이 구성되더라도 대학병원 병원장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잘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병원장들이 움직이기 위해선 결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아카데믹 메디슨의 가치에 대해 정부를 지속 설득해서 국내에 아카데믹 메디슨을 지향하는 의대와 병원들이 조금씩 생겨나도록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발제자와 패널들의 제언에 대해 세션 좌장을 맡은 대한의학회 정지태 회장도 화답했다. 정 회장은 “이번 자리를 계기로 의학한림원, 의학회, KAMC, 의학교육학회 등이 모여 TFT를 만들고 구체적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길 바란다”며 “오늘 세션에 참석해 주신 연자와 패널분들이 TFT 위원이 돼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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