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희생으로 겨우 유지해온 '필수의료' 국가책임제 도입해야"

[칼럼] 좌훈정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장, 대한개원의협의회 기획부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뇌출혈 사망 사건의 파장이 당초 예상보다 강하게 확산하고 있다. 사실 몇 달이 멀다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돼 왔지만, 지방의 어느 중소병원도 아니고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보니, 국민들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탓이다.

외형적으로 급성장한 우리나라 의료수준과는 달리, 중증 외상이나 치명적인 심뇌혈관 질환 등에 있어서 수도권의 일부 대형병원들을 제외하곤 사각(死角)지대가 숱하게 존재한다는 건 이제 국민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됐다. 그럼에도 서울아산병원에 뇌출혈 시 개두수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가 단 두 명밖에 없다는 현실은 대한민국의 의료제도, 특히 국민건강보험이 알고 보니 저비용 저효율의 극치였다는 민낯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한 문제점 지적과 각종 해법들은 지난 수십 년 간, 아니 최근 수 년 간에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었다. 그러나 사건 직후에만 잠시 반짝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면 다시 묻히는 냄비 같은 현상을 반복해왔기에 정부나 국회는 이번 역시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국민들이 느끼는 온도는 다르다. 전에 지방에서 그런 사건이 터지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래서 서울로 가야지.’ 또는 ‘빅5 병원에 모셔야 효도하는 거지’ 라는 방어기제를 발동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필수의료’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저수가(低酬價)와 국가적 지원 부족이라는 건 다 안다. 여태 그래왔듯 이번에도 정부나 국회는 관련 수가나 지원금을 찔끔 인상시켜주고 대신 다른 규제들, 예컨대 수술 의사 당직의무 제도 같은 것을 만들어서 더욱 쥐어짜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의사들만 갈아 넣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필수의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고, 이번 사건이 그 전기가 될 것이다.

의료선진화의 척도는 상비의료(常備醫療)

고대는 물론이고 중세까지만 해도 각 나라의 군대는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 때 급하게 징집되는 것이 상례였다. 평상시에도 나라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으면 좋겠으나, 그들을 먹여살릴만한 경제력을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근대 이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력을 갖추게 된 서구의 절대왕정 국가들이 상비군(常備軍, standing army)을 조직하면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해외 진출을 통해 국력을 펼치는 열강(列强)이 될 수 있었다. 전시에만 급하게 소집되는 군인들에 비해 상비군은 훈련도 잘 되어 있고 사명감도 높았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처우 또한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됐다. 결국 부국(富國)이 강병(强兵)을 만드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이를 의료에 대입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지금 의료제도는 실제로 시행한 행위에 대해서만 수가로써 보상하고 있다. 24시간 당직 근무를 해도 환자를 보지 못했다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구조다. 조금 비약해서 군대에 비유하자면, 전쟁이 나서 전투를 하지 않았다면 군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겠다는 거나 다름이 없다. 

이번 뇌혈관수술 외에도 이른바 필수의료라고 칭하는 중증 외상, 분만, 소아외과, 흉부외과 등의 분야들도 형편은 대동소이하다. 이처럼 병원 입장에선 적자만 나는 곳에 투자할 이유가 없고, 의사들도 힘들고 어려운 곳에 지원할 이유가 없다.

의료현장에 따르면 뇌출혈 개두수술의 경우 제대로 된 온콜시스템(On call system, 비상대기)이 돌아가려면 전담 전문의가 8명 정도는 돼야한다고 얘기한다. 그래야 체력적으로 무리 없이 당직도 하고 의사의 사생활도 보장되며, 교육수련병원으로서 학생이나 전공의 교육 및 연구 활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6명 아니 4명 확보도 힘들다. 인력 확보 예산도 없을 뿐더러 해당분야에 지원하는 전공의도 드물다. 이 모두가 첫 단추를 잘못 꿴 저비용 저효율 건강보험제도 때문이며, 나아가 개선 의지가 없는 정부와 국회도 한몫했다.

필수의료는 온콜시스템 확보부터

지난 수십 년 간 의사들은 붕괴하는 필수의료를 방치하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숱하게 경고해왔지만, 정부는 의사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심신을 갈아 넣는 의사들의 희생으로 어떻게든 필수의료 현장이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껏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건 제대로 된 투자 없이 쥐꼬리만한 지원금을 주는 대신 규제의무를 더욱 무겁게 지우는 징벌적 방식이거나, 다른 분야의 진료 수익으로 필수의료의 적자를 메우라는 식의 미봉책이었다. 심지어 국회는 공공의대를 설립하거나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엉뚱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지금 신경외과 전공의들이 왜 뇌혈관분야보다 척추를 선호하고 또 분만을 포기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점점 늘어나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가.

결국 분만 받는 산부인과가 없는 지자체가 늘어나는 등 변방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던 필수의료 붕괴가 바야흐로 서울 중심부까지 입성한 상황이 되었다. 예측이 어려운 의료현장의 다양한 상황을 감안하면 제대로 된 온콜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는 정부 당국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젠 더 이상 민간의료기관들과 의사들의 손해와 희생으로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는 착취적인 정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필수의료 분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는 일명 ‘필수의료 국가책임제’ 같은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포퓰리즘 정책에 사용되는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여서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국공립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필요한 의료 인력을 채용해서 운영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립외상전문센터나 도립분만병원 등을 설립해서 적정 시설과 인력을 확보하고 운영하라는 거다. 당장 신설이 어려우면 기존의 국공립병원들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을 계기로 필수의료, 나아가 우리 의료제도 전체에 대한 대수술이 필요하다. 1977년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남짓할 때 설계된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지금 3만5000달러인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소득이 증가하면서 의료에 대한 국민적 욕구가 커졌고 또 인구고령화와 신약·신의료기술 개발로 인해 의료서비스의 질적 제고 및 양적 팽창과 더불어 그 비용도 늘어났다. 따라서 국민들은 조세나 보험료를 더 부담하더라도 충분한 의료보장을 원하는 시대가 됐으며, 정부나 국회는 그에 따라 의료정책을 만들고 수행해야 한다.

이에 우선 필수의료만큼이라도 국가가 책임지는 정책을 한시바삐 만들어야 한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라는 클리셰처럼 국민을 설득하고 의사들과 지혜를 모아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잘못된 의료제도의 희생양이 됐던 많은 분들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추신(追伸): 모든 임상의학 분야는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그 근본이 되는 기초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세간에서 부르는 대로, 국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진료 영역들을 이른바 ‘필수의료’로 지칭한 것이니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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