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정원 증원 2000명 대란은 총액계약제 대란의 전초전이다

[칼럼] 주수호 미래의료포럼 대표·전 대한의사협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2000년 여름 의약분업이 강행되고 이듬해인 2001년 건강보험 급여비 총액은 17조8000억원이었다. 그리고 8년 후인 2009년에 그 2배를 돌파했고, 또 그로부터 9년 후인 2018년에는 4배를 돌파했다. 대략 10년이 채 안되는 주기로 건강보험 급여 총액은 2배씩 증가되는 추세를 보여왔고, 드디어 2022년에는 100조원을 넘어섰다.
 
대한민국의 의료비 증가폭은 대단히 가파르다. 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경우에 속하는데, 이로 인해 지난해 의사국가고시에는 한국의 의료비 증가추세를 가장 강력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진료비 지불 방법은 무엇이냐는 문항도 출제됐다. 그런데 그 답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총액계약제'다.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 성장률과 건강보험 급여비 증가 증가 추세를 고려하면, 늘어나는 의료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는 향후 10년내지 20년 이내에 총액계약제는 보건의료 시스템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학생들이 휴학한 이유는 당장의 수업 여건 악화와 교육의 질 저하 때문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수련 기간을 채우면 전문의를 취득할 수 있는 3, 4년차 전공의들까지 대거 사직 대열에 참여한 이유 역시 현재 전공의 수련 환경이 열악한 것도 있지만, 전문의 취득 후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다.
 
즉, 의대정원 2000명 증원에 맞서 학생과 전공의들이 대거 저항한 이유는 이러한 정책 방향이 의사로 살아가야 할 그들의 10년 후, 20년 후 미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들이 지금의 대치 상황이 종결된 이후에 사직한 전공의의 30%만 복귀해도 많이 복귀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이유는 바로 현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들의 미래가 좋아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의 목적이 10~20년 후 대한민국 의료의 안정화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고,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총액계약제가 부상할 시기와 맞물려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10~20년 후 의료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결국 폭발할 것이라 예상된다. 정부의 무리한 의대정원 증원이 성공하면 의료비 상승 속도는 더욱 빨라져 폭발 시기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의대정원 증원 2000명 대란은 총액계약제로 인해 발생할 대란의 전초전 성격을 띄고 있다. 만약 의대정원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강행 추진이라는 정부의 의료농단에 저항하는 이번 투쟁이 실패로 마무리된다면, 이후에는 곧바로 총액계약제의 파고가 밀어닥칠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수가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복지부가 의사들이 원하는 수가 인상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정부 행태를 볼 때 약간의 수가 인상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려는 정책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수가 인상을 덜컥 받아들이는 것은 음식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숨어있는 독을 함께 먹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 의약정 합의로 만들어졌던 처방료를 정부가 없애 버렸던 것처럼, 정부가 지불하는 돈이란 것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회수해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는 제대로 한 번 만들면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수가 인상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가서는 안 되고, 제도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민들이 ‘의사가 원하는 것은 결국 돈이었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추후 정부가 의사들을 더욱 부당하게 압박해도 여론은 의사들의 편에 서기는커녕 오히려 정부의 행태에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필수의료에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필수의료가 붕괴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일부 필수의료 분야의 수가만 인상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2001년 17조원대 이던 건강보험 급여비 총액이 2022년 100조원을 돌파했음에도 필수의료는 오히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는 단순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의료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없이 필수의료 분야의 수가만 일부 올려주며 불만을 잠재우려 하는 것은 곧 파산할 회사가 돈 잔치하는 꼴이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가 건강보험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마치 무한 자원처럼 소비하면서 자원 고갈이 임박해지는 시기가 되면 새로운 자원은 개발하지 않고 총액계약제라는 폭탄만 던질 계획만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는 국민 건강 유지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 순위가 높은 범위의 의료 서비스에 한해서만 소외되는 국민들이 없도록 보장해주고, 재정적 수용 범위를 벗어나는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야 한다. 즉,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고 장기간 유지가 불가능한 건강보험 강제지정제를 폐지하고 의료 서비스 제공과 이용에 대한 선택권을 의료기관과 국민들께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요양기관 강제지정제와 단일 공보험체제라는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큰 틀은 바꾸지 않고 문제가 발생하면 임시방편의 땜질로만 일관해 왔다. 결국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는 곪을 대로 곪아서 터져버렸고 의료비는 점점 국민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의사들은 지속 가능한 건강보험체계를 만들기 위해 여러 제안을 해왔지만, 정부와 언론 등은 그 제안을 의사들의 밥그릇 지키기 정도로 폄하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이제 더 이상의 땜질은 버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기가 됐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미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은 시작됐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시스템이 아닌, 의사와 국민 모두가 만족하는 시스템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녀야 하는 노예와 다름없는 현 체제에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의사와 국민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한 걸음 나아갈 것인가? 어떤 길을 선택할 지는 이제 전적으로 우리 의사들의 선택에 달렸다. 선택에 앞서 기억해야 한다.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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