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대 100주년 칼럼]⑤ 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1979년 47회로 졸업한 나는 부속병원에서 인턴과 병리과(당시는 해부병리과) 수련을 받는 행운을 가졌다. 병리과는 기초의학으로서 조교제도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76년 병리 전문의 수련제도가 생기면서 전공의로 근무했다. 병원의 병리과도 임상병리과(현재 병원 본관 1층 행정부서 자리)에 방 1칸을 배정받아서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공간은 물론 시설도 부족해 실제로는 기초 병리학교실에서 많은 것을 지원하면서 운영됐다. 자연히 전공의들의 일하는 공간도 현재 의대 본관 2층 서쪽 편 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던 인턴 때에도 의대 본관 2층 병리과를 자주 드나들었지만, 1980년 전공의를 시작하면서는 근거지는 본관 2층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과 학교를 오가며 일했다. 소위 그곳에(?) 요롱소리가 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일과였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병원일로 급히 병리과에 내려가면 '교수님이 올라오라고 전화 왔었다'라는 전갈을 받기가 일수였고, 그러면 다시 요롱소리 나게 학교 2층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교수님 혹은 윗 연차 지시를 받아서 교실에서 일하고 있노라면, 이제는 병원에서 급한 요청이 있다고 전화를 받는다. 그러면 또 요롱소리 나게 병원으로 내려가곤 했었다. 키도 작은 나는 잰걸음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학교와 병원을 발발이(다리 짧은 강아지)처럼 쏘다니고 다니니, 자연스레 여러 사람 눈에 띄게 되면서 '쟤는 병원일, 학교일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다니냐'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배우는 재미로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봄이 오는지, 겨울이 오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3년을, 이어서 학위과정 등으로 3년 등 총 6년을 근무하고 군의관 입대했으니 의대 4년과 더불어 10년을 동인동과 삼덕동을 배경으로 청춘을 보냈다.
제대 후 포항성모병원, 미국 유학, 대구 가톨릭의대, 영남의대 교수를 거치면서 2016년 다시 모교의 부름을 받아 근무하는 배려를 받게 됐다. 실로 40년 만에 모교 울타리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본관 건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당당하게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교수실을 본관 3층에 배정받았고, 병리과는 병원 신관 6층에 있었다. 다시 학교와 병원을 오가는 근무를 하게 됐다. 모교이면서 근무한 경력은 있었으나 나이 들어서 새로운 근무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처음 출근하는 날 붉은 벽돌의 의대 건물을 쳐다보면서 다짐했다. '자, 새로운 시작이다. 모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나는 행운아다. 힘은 들겠지만 자랑스럽게 노력하자'. 그렇게 시작한 근무에서 내게 신기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학교와 병원을 오가는 나의 발걸음에 나 스스로 놀랐다. 1980년대, 즉 나의 20대외 비슷하게 돌아간 것이다. 이제는 늙은이 걸음으로 익숙해져 있던 내 몸이 변한 환경에 따라 적응하고 있었다. 다시 발발이로 돌아간 것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본관 건물이 나를 정신적으로 과거의 나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버드 심리학 교수 '엘렌 랭어'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이 있었다. 70~80대의 연로한 노인 중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어야 하고, 혼자서 몸을 일으키기도 버거워 주로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는 노인들을 모집해서 외딴집에 격리해서 같이 생활하게 하여 신체 및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주변을 20년 전(1959년)으로 셋업해 당시의 실내장식, 가재도구, 생활여건을 만들어 놓고, 심지어 과거의 야구 포스터를 붙여 놓거나, 음악, TV를 틀면 과거 프로그램이 나오게 하는 등 완벽히 과거를 재현한 상황 속에서 지내도록 했다.
평소의 그들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험이 시작되고 난 직후부터 점차 스스로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고 간단한 일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실험 이틀째가 되자 다들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식사 후 뒷정리, 설거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점차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됐다. 일주일 후 여러 검사에서 신체적으로도 젊어진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실험의 결론은 환경의 변화가 사고방식을 전환시킬 수 있고 육체적인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실제 이 과정을 체험했다. 근 100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붉은 벽돌 모교 건물 덕에 말이다.
졸업하고도 동기회마다 20주년, 25주년, 30주년, 40주년 등 다양하게 모교를 방문하고 있고 항상 이 붉은 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서 남긴다. 이제는 50주년 행사도 생겼다. 본인들이 학교 다닐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니, 모두 한순간에 추억에 잠기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각자 기억 저 멀리 묻혀 있던 에피소드들이 본관을 보는 순간 올라오면서 추억에 젖는다. 눈물짓는 이들도 많다. 모두 이 건물이 만들어 내는 기적일 것이다.
1973년 강의실이 신관으로 모두 옮겨져 정착함으로써 본관은 교수연구실과 실험실로만 사용됐다. 강의를 마치고 정문 쪽으로 나가려면 본관 복도를 통과해서 가면 지름길이었으나 교수님들 눈에 띄는 것이 왠지 두려워서 모두 건물 바깥으로 돌아서 가곤 했다. 특히 아침 지각으로 헐레벌떡할 때도 학생이 본관 건물 복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언감생심이었다. 혹시 지나갈 일이 있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발소리를 죽이고 다녔다. 우리 경북의대 출신 모두에게는 이 본관 건물은 그야말로 경외의 존재였다.
우리나라는 빠르게 발전하고 도시 집중이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공간 부족을 겪는다. 그에 따라 옛 건물들은 현대풍으로 고쳐지거나, 확장되거나 하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 오히려 없어지고 신축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볼 공간이 없어져 벼렸다. 졸업생 동창들이 모교라고 찾아가도 옛 추억이 있는 모교는 사라진 학교들이 대부분이다. 나 자신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건물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심지어는 이전돼서 한 번씩 찾아가도 이방인이 돼버린다. 그 시절의 나의 추억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현대화와 비약적 발전이라는 화려한 조명 뒤에 생긴 쓸쓸한 어두움일 것이다.
지금도 학교 주변 옛길을 걷다가 보면 어쩌다 보존된 골목길이 보이기도 한다. 그럼 문득 걸어 들어가 보고는 딱히 그곳은 아니지만, 친구 하숙집과 비슷한 집을 보면서 그 친구와의 추억에 잠긴다. 또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우리 동네 옛 골목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100년을 지켜온 우리 모교 건물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으면서 졸업한 모든 동창을 안아주고 있으며 그들의 추억을 간직해 주고 있다. 어느 학교 졸업생들이 이런 기분을 느낄까?
이번 기회에 모교 건물이 어떻게 건축되고 보존돼 왔는지 조사해서 정리해봤다.
경북의대는 1923년 대구 자혜의원 건물 일부를 빌어 의학강습소로 개교한 것으로 시작돼 올해로 100년이 됐다. 그러나 자혜의원은 1926년 3월 13일 화재로 인해 소실됐다. 당시 재건축 논의과정에서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병원과 학교의 재건축 또는 이전문제가 함께 논의됐다. 이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설립됨에 따라 경성 의학전문학교의 지방 이전문제가 자연스럽게 불거졌고 이를 두고 평양과 대구가 유치경쟁을 하게 된 것이 큰 계기가 됐다. 즉 의학전문학교 TO를 대구로 가져오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학교에 걸맞은 학교 병원 시설을 갖춰야 했으며, 평양은 이미 그런 준비를 시작한 상황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논의는 진지해지고 추진을 서두르게 됐다.
1926년 6월 28일 대구 지역 유지들은 대구상의소(大邱商議所)에서 회합을 하고 의학전문학교 유치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해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 회합을 ‘의학전문학교 급속설치에 관한 대구유지협의회’로 정하고 ‘부지를 기부할 것과 상당한 희생을 들여 목적을 달성할 것을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협의회에는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을 포함 총 28명이 참여했으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장직상(張稷相)이 한 것으로 보인다. ‘대구 의학전문학교설치실현 기성회’를 조직하고 기부금 모집 등을 주도했다. 그는 관료 출신의 사업가로서 금융업 등 여러 분야의 활동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이와 같은 민간인의 움직임에 힘이 실린 당시 경북도지사 스도모토(須藤 基)는 도 평의원들과 대구 부윤(시장)과 유지들을 초청해 대구의전으로 승격하는 문제와 그에 상응하는 학교 건축을 위한 모금을 역설했다. 총 건립자금은 20만 원(화폐단위 圓, 조선신문에는 ‘원’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 발음으로는 ‘엔’, 지금의 약 100억 원)으로 책정해 5만 원은 지방비에서, 5만 원을 각 군.면에서 모금으로, 10만 원은 대구부(대구시)에서 책임지도록 했다. 자세한 모금내용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으나, 대구부의 10만 원 중에 다시 반 정도는 모금으로 조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총 모금액은 10만 원이 된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50억 원 정도를 대구.경북시민들이 성금을 했다는 상상을 하니 그 숭고함과 고마움에 고개가 숙어진다. 이렇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
1930년 이미 설립된 도립대구병원(현 경북대병원 본관, 1928년) 맞은편 뽕나무밭 2만 평 부지에 682평으로 도립병원과 비슷한 규모로 지을 계획을 했다. 이렇게 학교를 크게 신축할 생각은 이미 시작한 평양 의학강습소 건물(29년 준공)이 800평가량의 큰 규모인 것이 자극됐고,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는 데 손색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최종 평수는 평양의전을 능가한 940여 평이 됐다. 1931년 예산에 반영돼 2년 사업으로 추진됐다. 기부금 모금은 쉽지 않았으나 1930년 의학강습소가 의학교로 지정되면서 의학전문학교 유치가 희망적이라는 분위기로 탄력을 받게 됐다.
자혜의원 소실과 본관 건물 준공까지 4~5년 공백 기간 동안 학교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 진 것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임시 교사를 전전했을 것 같다. 따라서 본관 설립과는 별도로 우선 1931년 해부실습실과 강의실 공사부터 시작됐다. 7월 1일 오전 10시 반 착수식을 거행하고 신축 공사를 시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해부실습실은 목조건물로서 건평 92평이며 천장은 돔 형태였고 부속실로 해부표본제작소, 사체 저장실, 병리 해부실(부검실), 세균검사실, 준비실, 욕탕 등을 갖췄다. 즉 지금의 해부실습실 건물이 아닌 임시 목조건물이 만들어졌다.
강의실은 건평 48평으로 240명의 학생이 강의를 받을 수 있는 규모였다. 해부실습실 및 강의실은 11월 21일 준공됐고 27일 개업의사 30명, 학생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축 낙성식과 함께 기념 학술강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었으나 그 목조건물에 대한 도면 혹은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본관 공사 착수는 기부금, 은행 대출 등 자금조달이 된 후 경상북도 회계과 영선계에서 설계하고, 건축공사는 대구에 근거를 둔 합자회사 야시로조(屋代組)에서 했다. 1932년 11월23일에 착수, 33년 10월31일에 준공했다고 한다. 최종 942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조에 붉은 벽돌로 마감한 4층 건물의 본관이 완성됐다. 1년이 안 된 기간에 이를 마감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빨라도 2년은 걸린다고 하는데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서류상 시공 시기와 실제 시기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에 공사 진행 과정들이 잘 보도되고 있어서 날짜의 조작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글의 대부분도 당시 기사를 참고로 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병원을 지어 본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팀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것이며, 그 실력에 대해 경탄해야 할 것이다.
실제 현재 본관 4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의 중간 방을 가보면 천정과 일부 벽체가 노출된 곳이 있다. 그곳은 작은 나무 막대기를 이용한 촘촘한 프레임으로 구성돼있는데 일일이 작은 못으로 못질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목수들이 천정을 향해 고개와 허리를 꺾으면서 일했을 터인데, 간격 하나 틀린 곳이 없는 기가 막힌 솜씨에 감탄할 것이다. 작은 부분이지만 당시 최고의 숙련공들이 모였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고 중요한 본체 부분 깊숙한 곳 역시나 훌륭한 솜씨로 시공됐으리라 믿음이 간다.
1933년 7월 28일 오전 상량식을 하고, 그해 12월 17일 낙성식(준공식)을 거행했다. 당시로써는 최신의 건물이었으며 기초의학 연구실과 사무실이 배치됐다. 1층에는 사무실, 교수실, 서고, 경비실, 화학실, 생리학실, 병리조직학실, 표본실 등이 배치됐다. 행정실과 학생실습실로 이해된다. 2층에는 약물학실, 위생학실, 세균학실, 물리학실, 법의학실, 3층에는 회의실, 식당, 도서실, 교장실, 4층에는 대강당이었다. 총공사비는 1억1699만6390엔(약 60억 원)이 들었다고 기록돼있다.
전해지는 기록과 현재의 모습을 보면 1층 동편에 존재했던 계단 강의실에 대한 언급이 없고, 강당이 2층인데 4층으로 기록된 것이 오류로 생각되며, 교장실 즉 학장실은 항상 2층이었다는 증언들에 의하면 3층도 오류 혹은 처음 계획이 변경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해부학 실습실(본관 우측, 테니스장 뒤쪽)은 1936년에 증축됐다. 포함된 부검실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934년에는 총기고, 화약고 등이 건립됐다고 한다. 총기고는 본관 좌측 공터에 세워졌고, 해방 후에는 창고로 쓰이다가 6·25전쟁 이후 CMB(China Medical Board, 전후 한국 의학발전을 도운 미국 록펠러 재단) 원조와 학교자금으로 공작실로 개조됐다. 1980년대까지 학교 실험기구 수리 혹은 제작을 했다. 기초교실 실험에 필요한 특수한 초자기구(유리실험기구) 등을 만들어 공급했다고 하며, 도서관과 학교, 병원의 자료집 논문 등의 제본 등을 했다. 현재 도서관에 비치된 논문집 및 외국잡지들의 제본 등은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97년 의과대학과 병원 담장을 철거해 개방하면서 정원 일체 정비가 있었을 때 철거됐다. 철거 당시 건물에서 나온 붉은 벽돌을 학교에서 보관했다가 기념품으로 제작됐다. 본 건물 전면 양측으로 건물 높이 만큼 자란 히말라야삼목 나무들도 그때 베어졌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의과대학도 시련을 맞았다. 건물은 미군시설로 사용하도록 수용돼 주한 미군사고문단 본부로 사용됐다. 그러나 건물의 손상이나 구조 변경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일부도 군 지원 및 징집이 됐고, 임시 학교가 세워져서 다른 곳에서 교육을 이어갔다고 한다. 전후 건물을 돌려받고 정비해 다시 사용하게 됐다.
1971년 CMB 원조와 정부의 지원금으로 본관 건물의 좌측 날개부에 덧붙여 도서관 3개 층을 증축했다. 1972년 동편 계단교실은 강의동 신관 건물이 완성됨에 따라 교수회의실로 개조됐으며 한곡장학회 주경진(전 해부학 주강교수의 부친)의 찬조로 이뤄졌다. 1974년 김집(16회, 김집 소아과, 전 체육부 장관)의 지원으로 2층 중앙강당을 수리해 각종 학술회의 및 교수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1971년부터 본관 북쪽으로 신관 건물이 신축 및 증축이 계속되면서 의과대학의 대부분 기초교실이 옮겨갔고, 강의실이 완비됐다. 아울러 간호학과 강의실 및 연구실 등이 배치됐다. 치의학과의 개설에 따라 다시 서쪽 윙이 신축돼 현재의 ‘ㅁ’자 모양의 건물이 됐으며 중앙에는 잔디밭과 정원이 꾸며져 있다.
2000년에는 다시 현대화된 강의동이 노영하 동문의 찬조와 함께 완성됐다. 칠곡병원 건립과 함께 2013년 칠곡 학정동에 연구동이 만들어지고 2016년에는 최첨단 교육 동(강의실, 실습실 및 학생시설)이 완공돼 오늘에 이른다.
2003년 1월 2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본관 건물은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며, 전체적으로 보조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전체와 세부 구성이 치밀하고,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건물로서 근대 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되어 사적442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경북대병원 본관도 사적 제443호로 지정됐다.
의과대학과 병원의 해방 전 역사에 관심이 지대한 김용선(52회, 영상의학과 교수)의 개인 조사에 의하면, 본관 건물은 당시 일본에서 최첨단으로 적용하던 내진 설계로 됐을 것이라고 한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진이 있었을 때 유일하게 피해를 보지 않은 건물이 도쿄의 임피리얼 호텔(제국호텔)이었다고 한다. 도쿄 임피리얼 호텔 신관은 미국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했는데, 내진을 위해 기초를 아주 넓게 하고 그 위에 건물이 얹혀있으면서 20m 간격으로 연결되게 해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지진으로 모든 건물이 무너져서 바다와 같은 도쿄 폐허 시가지에서 홀로 우뚝 선 유일한 건물이 됐기에 지금까지도 명품 호텔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의과대학 배수로 공사 현장에서 김용선이 직접 기초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하며, 그 내진 설계가 그대로 적용됐다면 그 넓은 기초는 현재의 테니스장 밑으로까지 이어져 있을 것으로 주장한다. 어쩌면 본관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내진설계 건물이 아니었을까?
역사로 돌아본 붉은 벽돌의 본관 건물은 지금까지 90년을 굳건히 서 있으면서 수많은 의학도가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번 100주년 행사를 즐기면서 앞으로도 경북의대의 역사와 함께 건재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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