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처방의 추억 - 의사가 대리처방을 하는 이유
생각을 고쳐먹은 이유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때였던 것 같다. 한 중년 남성이 진료실로 들어와 사정하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1주일째 당뇨약을 못 드시고 있어요." 1주일 전에 대리처방을 거부당했던 보호자로, 그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쉽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나를 다시 찾았다. 거부당했던 보호자들이 어떻게든 다른 대안을 찾았으리라고 긍정적인 추측만 하던 나에게 환자 방치 그 자체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호자 개인의 안하무인 때문이다' 라고 그 순간을 넘기려 했지만 찝찝함은 멈추지 않았고, 그동안 대리처방을 거부했던 보호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대리처방을 거부당했다가 결국 환자를 직접 모셔오지 못한 보호자 중 상당수가 환자를 방치한 채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대안을 찾았더라도 약을 복용하지 못한 과도기가 있었던 사례가 생각보다 많았다. 내가 고집했던 그 '철저함'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고, 무슨 결과를 만들었는지? 나는 대리 처방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해하는 대리처방은 환자와 직접 대면 없이 처방했을 때의 리스크를 의사가 떠안고 시행하는 의료서비스이다. 내 개인 경험을 살려 말하자면 누군가가 알아주라는 뜻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융통성을 발휘하고 리스크를 감당해 환자나 보호자에게 편의를 줄 때는 조금은 뿌듯함을 갖게 하는, 그런 서비스다. 주위의 많은 동료 의사들이 대리처방 행태를 비난하는 기사에 어리둥절해 하는 이유다. 환자를 위해 발휘한 융통성(그것도 법적으로 예외를 인정한)이 의사를 몰염치한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사를 접하고 차라리 '대리처방' 자체를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의사도 많다. 아예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보호자들이나 간병인들이 부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엔 의사들의 억울함이 베어 있다
4월 2일 방송된 SBS 뉴스 - "약만 타가라" 환자 상태 안 보고 '대리처방' 남발
"이 병원 의사들은 환자인 박 씨 대신 가족을 불러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의문이 들었던 문구이다. 대리처방은 철저하게 환자 혹은 보호자 필요 때문에 생긴 서비스다. 의사가 환자 대신 보호자와 대면하여 얻는 편의 혹은 이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리처방이 대면처방보다 의사에게 간편할까? 우리나라 대면처방은 아쉽게도 2분 진료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더는 짧아질 수가 없는데 무슨 편의성이 있을까? 오히려 의사에게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처방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는 서비스다. 그리고 대리처방은 대면처방보다 개인부담금도 적다. 설령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고 의심해봐도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대리처방' 관련 기사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어느 구석진 시골에는 정기적인 검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식들이 처방받아온 아스피린같은 약 몇 개에 의존해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식의 기사는 대중의 비난을 두려워한 의사에게 '대리처방'을 머뭇거리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내가 철저하게 지킨 그 알량한 욕심이 그랬듯, 어떤 할머님의 혈압과 혈당은 올라간 채로 방치될 수도 있다. 대리처방을 왜 하게 되었고, 대리처방을 받아야 하는 환자나 그 보호자를 한 번쯤이나 생각은 해봤는지, 해당 기사를 작성한 분께 묻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환자와 '직접 대면'을 통한 진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그런 의미에서 원격진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제발' 파헤쳐주길 바란다.)저작권자© 메디게이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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