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생존장병들은 '고생 많았다', '살아돌아와서 고맙다'는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서 특별강연...트라우마에 죄인 인식까지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최원일 천안함 함장

[메디게이트뉴스 정혜리 인턴기자 차의대 의학전문대학원 본4] "천안함을 탔던 모든 장병들은 한 배를 탄 가족임에도 함미 전사자들은 영웅, 함수 생존자들은 죄인이 됐다. 천안함 장병들을 끝까지 나라와 국민들을 지키는 군인으로 생각해주시고 자신이, 우리 가족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은 '천안함 생존장병의 12년'을 주제로 이같이 밝혔다. 

최 함장은 해군사관 학교 45기로 1987년 1월 24일 입대했고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2010년 6월까지 천안함 16대 함장으로 복무했고 지난해 해군 전역을 했다. 현재 군에서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게 큰 힘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천안함은 코리아타코마(현재는 HJ중공업)에서 건조했으며, 진수 일자는 1987년 7월24일이었다. 길이는 축구장 크기 정도로 약 88m, 넓이 10m, 최고속도 60km/h였다. 과거 북한이 간첩이나 소형선박을 자주 내려 보낸 것에 대한 수상전에 대비해서 만든 것이다.

최 함장은 "잠수함을 탐지할 수 있는 소나(sonar, 수중 음파탐지기)가 달려 있었으나 애초에 대잠수함 목적의 함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소형의 소나를 탑재했다"라며 "시대에 뒤처진 구형을 이끌고 전방으로 나가 작전을 수행한 것이 천안함 침몰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피격사건 이해를 위해서는 2010년 당시 남북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MB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3월 남북대화 중단,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8월 이후 김정일 건강악화 등으로 내부 조직 강화를 위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강경조치가 심화됐다.

2009년 11월 대청해전에서 대패한 북한이 다시 보복성전을 개시해 2010년 1월 (천안함 피격 사건 1~2개월 전) NLL 근해에 수백발의 해안포 사격으로 도발 수위를 높여갔다. 천안함은 유도탄, 해안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북한이 레이더로 탐지하지 못하는 안전한 백령도 인근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당시 국내는 6.2 지방선거 준비 및 군 지휘부 교체 시기로 정세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장병들 입원상태에서 대국민 인터뷰에 계속되는 조사...깊은 상처로 남아  

천안함은 2010년 3월 16일 (사건 발생 10일 전) 화요일 오후 1시 백령도 근해 출동 임무 차 평택항에서 출항했다. 당시 최 함장은 3월 30일까지 바다에서 경비 임무를 하라는 지시를 부여받았고, 사건 전날은 기상 상황 악화로 인근 대청도에 닻을 내리고 피항했다. 다음날 새벽 기상이 호전돼 경비 복귀를 했고 같은 날 밤 9시22분 북한의 기습적인 어뢰 공격을 받았다.

최 함장은 "당시 천안함 대원들은 배가 기울어져 발 하나 제대로 디디기 힘든 순간에도 각자 임무를 침착하게 수행하며 서로를 살리려고 노력했다"라고 회고했다.

해군은 3월 27일부터 본격적인 수색과 구조작전을 시작했다. 4월 15일에는 절단된 뒤쪽 함미를, 4월 24일에는 앞쪽 부분인 함수를 인양했다. 4월 29일 합동 영결식이 진행됐고, 5월 20일 정보 민군 협조단은 북한의 군사도발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부상이 심했던 장병들은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었고, 함장을 비롯한 부상이 적은 장병들은 4월 3일까지 전우들을 수색한 후 국군수도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최 함장은 "당시 수많은 의혹이 있어서 당황한 군과 정부는 4월 7일 수도병원 물리치료실에서 장병들 모두에게 환자복을 입히고 대국민 인터뷰를 시켰다. 이때 인터뷰 노출 기억은 아직도 생존장병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장병들은 외상 상태가 호전된 순으로 국군수도병원을 퇴원했고 5월 23일까지 평택 고속정 생활관에서 격리돼 생활했다. 5월 24일부터 6월 5일까지 경상남도 진해에 위치한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각종 치유 프로그램과 고위급들의 방문을 받았다. 6월 6일 현충일 행사에서 먼저간 전우들에게 인사 후 58명의 생존장병들은 각자의 전임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건 이후 최원일 함장은 3월부터 11월까지 각종 조사를 받았다. 6월 2일에는 러시아 조사단에서 조사받았는데 러시아에서 공로메달을 받았다. 이후 피의자 신분으로 계속 조사를 받다가 그 해 11월에 정리가 돼서 국방부 징계위원회를 거쳐 징계유예를 받았다.

최 함장은 "당시 혐의는 첫째, 북한 잠수함이 있는데도 왜 경비구역을 이탈하지 않았는가 둘째, 왜 함정의 속력을 내지 않았는가였다"라며 "당시 너무나 힘들었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전우들을 생각하며 명예회복을 위해서 버텼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에 대한 고소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생존장병들 트라우마로 배를 타지 못하는데, 패잔병이라는 부정적 여론 

천안함 장병은 총원 104명이며, 그 중 전사자가 46명, 생존자가 58명이다. 생존자 중 현역으로 군에 남아있는 사람은 23명, 예비역은 35명이다. 사회로 나온 전역자가 더 많은데, 현역들은 초기에 트라우마로 배를 타지 못해 함정근무 점수가 부족해 진급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최 함장은 "예비역들은 현역 시절 정신과 진료를 받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록에 따라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고 인증을 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진료 기록 미비로 전역 후 국가 유공자 신청이 매우 힘들었다. 더욱이 정신과 진료는 인정을 잘 해주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토로했다.

최 함장은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며, 함장을 포함한 생존장병들에게 패잔병, 경계에 실패한 함정이라는 부정적 여론이 존재한다"라며 "고위층장병들이 지휘관 교육 시 천안함 장병들이 있는 자리에서 경계에 실패했다, 살아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라는 말을 했던 사실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안함 장병들을 둘러싼 오해 중 하나로 ‘보상금은 얼마나 받고 입다물고 있나’인데, 생존장병들은 국가 보상금을 받은 적이 없다"라며 "초기 언론에서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온갖 추측이 난무했으며, 각 방송사, 신문사의 과도한 취재 경쟁으로 자극적이고 무분별한 기사들이 보도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에 따르면 정권의 대북정책 실패와 정보실패를 천안함에 대한 경계실패로 돌리며 북한 소행 가능성을 배제했다. 또한 해군 출신들의 추측성 발언, 군사보안으로 인한 자세한 설명 부족으로 해군 작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 국민들의 오해와 불신이 발생했다.

최 함장은 지난해 2월 말 34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천안함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과 악플에 대응하면서 현재는 유튜브 활동, 방송 출연 및 허위 사실에 대한 법적 조치를 통해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 함장은 "천안함을 탔던 모든 장병들은 한 배를 탄 가족임에도 함미 전사자들은 영웅, 함수 생존자들은 죄인이 됐다. 생존자들에게 왜 너희들은 전우들을 다 죽이고 살아 돌아왔느냐는 말은 가장 큰 상처가 됐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가 돼버렸다"라고 했다. 

최 함장은 "천안함 장병들을 끝까지 나라와 국민들을 지키는 군인으로 생각해주시고 자신이, 우리 가족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다"라며 "저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지금까지 물질적 보상보다는 ‘고생 많았다.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는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저와 길게는 1년, 짧게는 1주까지 함께한 전사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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