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볼모로 삼은 건 오히려 정부다

엉터리 자료에 의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정책 강행은 민주주의 가면을 쓴 또 다른 폭력

[칼럼] 좌훈정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장·대한개원의협의회 기획부회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사회적 갈등이 증폭돼 어느 직역이나 단체가 집단행동에 들어가면 클리셰(cliché)처럼 나오는 표현이 있다. ‘국민을 볼모로 삼아 자신들의 이익을~’ 언제 누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뒤떨어진 표현이 있을까 싶다. ‘볼모’의 사전적인 의미는 ‘약속 이행의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사람이나 물건’이라고 하는데, 국민들이 특정 직역이나 단체에 볼모로 잡혀있을 이유도 없고, 상대에겐 그럴 만한 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자신의 정책 추진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말이 ‘국민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이것 역시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말이다. 도대체 어떤 국민이 무엇을 원했다는 말인가. 이는 대의제(代議制) 정치를 부정하는 뜻이기도 한데,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국민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한다면 정치 지도자를 굳이 선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서울특별시 25개구(區) 중 한 곳에 쓰레기매립장 등 혐오시설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 후보지로 예정된 구의 반발은 실로 격렬하겠지만, 24개 구들은 대부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대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소수의 반대를 묵살하고 정책을 강행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좀 더 단적인 예를 들자면, 국민 일인당 일억 원씩 주자는 여론조사를 해보자. 단순한 여론조사가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서 정부가 무조건 추진한다는 전제 하에 찬반이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경험의 함정에 빠진 보건복지부
 
이번 의대정원 증원 사태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보건복지부의 행태를 보면, 과거부터 이어져온 구태의연하고 강압적인 행정을 이번에도 똑같이 되풀이해오다가 큰 역풍을 맞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보건의료정책에 있어 전문가이면서 당사자인 의사들과 사전에 충분히 상의해 원만한 타협점을 찾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회의 몇 번 하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도 거부하면서 의료계 의견을 수렴했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정책을 강행해왔던 것이다. 여태껏 그런 방식들이 대개 성공해왔기에, 이번에도 '의사들이 반대해봐야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상부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의대정원 증원을 바라보는 국민 여론 또한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의사 숫자가 늘어나면 의사를 만나기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또 의료서비스가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찬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그러한 국민들의 기대에 편승해 의대정원 증원의 장점(?)만을 홍보하고 단점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고 있다.

의료계가 수없이 지적했던 의대정원 증원으로 인해 예상되는 문제들을 보면 의대 교육 부실로 인한 의사들의 실력 저하나 이공계 붕괴 현상, 의사 수 증가로 인한 전체적인 국민 의료비 증가나 기존의 필수의료 이탈 현상이 오히려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의대증원으로 무늬만 장점보다 실질적인 단점들이 훨씬 크고 많아서 겨우 유지되고 있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 자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게 보건복지부는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의사들을 겁박하고 있으며,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의사들이 국민을 볼모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오해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정작 국민을 볼모로 삼은 건 의사가 아니라 정부다. 터무니없는 정책 추진에 대해서 의사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을 알면서도, 또 필수의료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전공의들이 일할 의욕을 잃고 그만 둘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강행한 것이 바로 보건복지부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더 이상 환자 곁을 지키지 못하도록 상황을 악화시킨 책임이 바로 그들에게 있지 않은가.
 
국정을 책임지고 국민의 안전을 지킬 의무는 우선 정부에게 있다. 이번 발표를 의사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보건복지부가 잘 알고 있었다. 의사들이 개별적으로 행동하든, 집단으로 대응하든,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항거하리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상부를 속인 건 보건복지부의 관료들이 아닌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는 정부에 있다
 
이젠 국민들도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공짜로 1억원씩 나눠주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치솟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재원을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서 빼앗아와야 하듯 의대정원 증원이라는 정책 또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난 2월 6일 보건복지부가 당사자인 의사들과 논의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졸속 발표했던 의대정원 증원은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온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벌인 정치적 쑈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번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 발표와 포인트를 벗어난 필수의료 패키지는 의사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2000명 증원의 근거를 대라는 의사들의 요구에도 보건복지부는 묵묵부답이다. 당연히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하고 국가가 지닌 행정 사법권을 악용해 처벌을 으름장 놓고 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국민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정부에 볼모로 잡혀있는 셈이다.
 
헌법에도 명시된 것처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 오도된 다수의 여론이 아니라 합리적인 소수의 의견에 충분히 귀를 기울였을 때 그 행정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번처럼 엉터리 자료에 의한 그리고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정책의 강행은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온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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