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필자는 현재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내 역사기록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우연한 기회에 영서 고병간 박사의 일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 흉부외과의 창시자, 경북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고병간 박사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흉부외과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9년 6월 7일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지금의 경북대병원에서 한국 최초로 전폐적출술을 실시해 성공하셨는데 이는 미국의 Graham이 1933년 처음으로 전폐적출술을 실시한 후 16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의학은 홍수와 같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했으며, 한국의 흉부외과도 그 혜택을 받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1899년 1월 24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부친 고승헌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1915년 평안북도 의주의 신영소학교를 졸업, 미국인 선교사 George Shannon McCune (한국 이름 윤산온)가 교장으로 있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고 학령기를 넘겨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급우들보다 국가에 대한 관념이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성격으로 스스로 공부에 열중해 성적은 늘 남보다 앞섰으며, 재학 중이던 학교가 미션 계통이라 기독교 교리에도 충실해 선교사들의 신임이 두터우셨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성장한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학생의 몸으로 3.1운동에 앞장서셨습니다. 불의에 굴할 줄 몰랐던 선생님께서는 일본 관헌에 체포돼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된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한 죄로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셨습니다. 1920년 출옥한 선생님께서는 신성중학교 선생님과 선교사들의 특별한 배려로 복학해 그 다음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192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셨습니다.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세브란스의전 재학 중에도 신앙생활은 물론 교우관계나 학업에 있어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셨으며 교수들로부터 총애를 받아 1926년 26세 때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셨습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외과학 교실에는 의학연구와 선교에 전념하는 미국인 외과전문의 러들러 (Alfred Irving Ludlow) 교수가 있었는데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러들러 교수 밑에서 2년간 수련을 마치고 1927년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제혜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제혜병원은 전염병동을 결핵병동으로 바꿀 만큼 많은 결핵환자들 있었지만 당시에는 화학요법의 발달이 미미했습니다. 내과적 치료보다 폐결핵의 외과적 치료의 절실함을 느낀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흉부외과를 전공하고자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셨습니다.
1937년 귀국해 본인이 희구하던 흉부외과의 개척과 후진 양성을 위해 모교인 세브란스의전 외과교수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외과학교실에서 흉부외과를 새로 만들려는 선생님의 의도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이에 따른 물자 부족 등의 긴축정책이 외과학교실에까지 파급돼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일본간에 전운이 감돌고 교수로 와 있던 선교사들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자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생님께서는 1940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이 물러남에 따라 관공서,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이 모두 대혼란에 빠졌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으로 지방 교육기관을 재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흉부외과를 소신껏 키워보겠다는 결심으로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미군정청이 제안한 대구의학전문학교(대구의전) 교장 자리를 기꺼이 수락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1945년 9월 교장으로 취임한 후 한 달 만에 대구의전은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했습니다.
학문연구는 물론이고 교육과 진료에 대한 선생님의 진지한 태도는 선생님을 경원시 하던 사람들까지도 선생님께 고개 숙여 내심 존경심을 갖게 했는데, 이는 항상 정도를 가려는 선생님의 진지한 성격에서 비롯된 소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옳다고 생각하면 그 소신을 결코 굽힐 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님을 ‘고불통’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1947년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국제암학회에 참석,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의학계를 둘러보던 중 미국흉부외과의 발전에 또 한번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학장으로 부임하신 후에도 흉부외과에 대한 관심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아 의대부속병원 뿐만 아니라 국립마산요양원과도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폐결핵환자의 외과적 수술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1948년 10월 6일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국립마산요양원으로 직접 출장을 가셔서 세브란스의대 외과에서 파견된 유승화 선생님을 조수로 한국 최초의 흉곽성형술을 시행하셨고 이를 계기로 한국 흉부외과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1949년 6월 7일 전신마취기도 없는 열악한 조건의 대구 의과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국소마취로 한국 최초의 전폐적출술이 고병간 선생님의 집도로 실시됐습니다. 그 후 국립마산요양원에서 30례 이상 수술을 시행했는데 환자의 예후가 좋아서 선생님은 당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흉부외과 의사로서의 최대의 보람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수술에 참여했던 세브란스 의대의 유승화, 국립마산요양원의 이완영, 대구의과대학의 이성행은 선생님의 대를 이어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했습니다.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1949년 대한적십자사 경상북도지사장, 1951년 문교부 차관, 이듬해 1952년에는 경북대 초대총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당시 의과대학장까지 겸직을 했는데 방대한 종합대학교 발전계획을 그 특유의 고집과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셨습니다. 취임 초기에 전국대학총학장회의를 유치해 우리 대학 개교의 고고한 함성을 전국 대학에 알리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시 회의에서 제안했던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구체적 방안’ 의제는 한국 대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이정표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후 1953년에는 대한외과학회 제6,7대 회장과 1955년에는 대한결핵협회 제2대 회장으로도 선출되셨습니다.
1955년 경북대 기독학생회 주최로 기독교 학생 회관 (현 경북대 기독센터) 건립을 위해 모금활동을 전개됐을 당시에도 총장이었던 고병간 선생님께서는 건축에 필요한 트럭 및 각종 장비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까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경북대학교 본교의 교가는 1958년 5월 28일 종합대학교 개교 제6주년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제창됐는데 가사는 당시 총장이셨던 고병간 선생님께서 지으셨고 작곡은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장이며 대구 출신이셨던 현제명 교수가 담당했습니다.
1959년 경북대 제2대 총장에 연임되셨으나 이듬해 1960년 모교인 연세대 총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다음해 1961년 세브란스병원장으로 가서 병원 발전에 헌신하셨고 1964년에는 숭실대 학장으로 옮겨가셨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66년 12월 9일 전국대학총학장회의에서 뇌출혈로 졸도해 11일에 별세하셨습니다. 향년 67세, 중학교 2학년 때 결혼한 공은일 여사와의 사이에 1남4녀를 두었습니다.
신성학교사에서 고인의 친구였던 연세대 심인곤 교수는 고병간 선생님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박사는 경쟁심이 강하여 심신을 수양할 때는 사사건건에 No.1이 되려고 무한히 노력했다.
박사가 숭실대학 학장으로 근무할 때에 나는 연희동 자택을 방문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원도 없고 현관도 없고 응접실도 없었다.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도 없고 렘부란트의 그림도 없고 덴막제의 가구도 없었다.
오늘날 대학총장들과 병원의사들의 주택과 비교하면 천양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일생을 헌신한 교육가의 보수이냐 하는 탄식이 일어났다.
박사는 제자들을 부하게 했지만 자기를 부하게 하지 못했다.
박사는 이 초라한 집에서 간이한 생활과 고원한 사색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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