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 환자 미국 응급실 잘못 갔다간 검사비만 1300만원...미국 응급의료 적정수가 보상·과밀화 방지
[필수의료 특별기획] 분류체계 명확히 하고 미국 응급실 의사 주3회 근무, 환자 평균 10명...응급실 폭행 예방 등 의료진 이탈 방지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 세계 응급실·중환자실을 가다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대책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병원들의 필수의료 중심인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어떤 모습이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요. 메디게이트뉴스는 일본과 미국 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두루 탐방한 다음 국내 필수의료 정책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연속적인 기획 시리즈를 이어갑니다. 본 기사는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올해 한국 의료계를 흔들었던 단어를 떠올리면 단연 '응급실 뺑뺑이'를 빼놓을 수 없다. 중증 응급환자가 응급실을 찾지 못해 응급실 주변만 돌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비슷한 현상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정부와 의료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대구 한 건물에서 추락한 10대가 응급실 네 곳을 전전하다 숨졌고 6월엔 대전의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35km를 전전하다 뇌출혈로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반면 미국은 신속한 응급의료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많다. 응급실 내 경증환자 분산을 위해 어젼트케어(Urgent care)를 적극 활용하는가 하면, 각 병원에 따라 패스트트랙(Fast tracks) 시스템 통해 환자 중증도 분류와 진료를 신속하게 처리해 빠른 병상 회전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메디게이트뉴스는 미국 응급의료 시스템을 알아보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LA)에 위치한 LA할리우드 차병원을 방문했다.
어젼트케어·패스트트랙으로 응급실 경증환자 줄이고 효율성 높여
LA할리우드 차병원은 응급실에 방문하는 환자 중 25%가 중증환자일 정도로 입원율이 높은 편이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 응급실을 통한 입원율은 10~20% 미만인데 이에 비하면 환자 중증도가 평균 이상인 셈이다.
병원은 응급실로만 30병상 정도를 운영하고 있고 이 중 중환자 진료가 가능한 병상도 10개나 되지만 상황에 따라 환자가 몰리게 될 땐 병상이 부족할 때도 있다.
이 같은 응급실 과밀화를 해결하기 위해 LA할리우드 차병원은 응급실 패스트트랙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경증환자와 중증환자 치료 루트를 별도로 분리해 진료인력까지 따로 배치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를 통해 경증환자는 빠르게 귀가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중증 응급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 있다.
미국의 어젼트케어(Urgent care)도 응급실 경증환자를 줄일 수 있는 주요 시스템 중 하나다. 미국 응급환자들은 응급 이송이 이뤄질 때 자신이 응급실 혹은 어젼트케어로 이송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보통 경증환자들의 경우, 어젼트케어에서 간단한 응급진료를 받고 귀가하는 경우가 많으며 보다 중한 환자들이 응급실로 오게 되는 시스템이다.
LA할리우드 차병원 김보라 Cheif Project Officer(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패스트트랙 시스템을 통해 효율성이 매우 높아졌다. 환자가 병원에 도착함과 동시에 중증도 분류가 이뤄지고 중증도에 따라 즉각적인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병원 입장에서도 긍정적이고 환자들도 대기시간이 줄어들면서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병원 입장에서 경증환자에게 어젼트케어를 강요할 순 없지만 비용적인 측면에서 경증환자가 걸러지는 효과가 있다"며 "상대적으로 어젼트케어는 비용이 저렴한 대신 응급실은 여러 검사를 거치게 되면 1000달러에서 많게는 1만달러까지도 비용이 청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방본부가 응급실 이송 100% 관할…“응급실 뺑뺑이 나올 수가 없다”
미국의 응급환자 이송과 전원시스템도 소위 '응급실 뺑뺑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다. 미국은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소방본부(Fire department)에서 응급환자 이송을 전담하고 있다. 중앙관리시스템을 통해 소방본부 관할 응급실과 환자 상황이 모두 실시간으로 체크되고 진료여력이 있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이 이뤄진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해당 병원의 배후진료 여건, 병상 과밀화 정도, 응급의료인력 등이 사전에 확인된 상태에서 환자 이송이 이뤄지기 때문에 재차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김보라 CPO는 무엇보다 미국 응급의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로 '적절한 응급의료 수가 체계'를 꼽았다. 의사와 간호사 등 전문인력의 진료수가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기 때문에 인력 부족이나 병상 과밀화 등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의 경우 의사와 환자 비율이 중환자실 2대1, 응급실이 4대1로 응급실 간호사 비율은 2대1를 정확히 지키고 있다. 한국은 응급의학이나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에 대한 수가가 낮아 인력난이 유독 심한 경우가 많은데 미국은 의료수가가 잘 보상되는 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런 이유로 오히려 미국은 한국의 기피과로 불리는 과목의 인기가 높고 적정 인력을 확보해 제대로 된 진료가 이뤄질 수 있다"며 “적정 인력 비율이 유지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료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미국도 인력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레지던트 매칭 프로그램(National resident matching program)'에 따르면 2023년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555명이 미충원됐다. 이는 1년 전인 2022년 219명에서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지난 2021년 3734명이었던 응급의학과 지원자는 2년 만에 26% 감소해 2765명에 그쳤다.
이에 미국병원들은 응급실 내 응급의학과 전문의 부족에 대비하기 위해 진료지원인력(PA)이나 전문간호사(NP) 고용을 늘리고 있다. 상황에 따라선 3~6개월 가량 계약직 간호사들을 대거 채용해 인력난 문제에 대비하고 있다.
다만 응급실 폭행이 적고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근무환경이 개선되고 있는 점은 향후 미국 응급의학과 의사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LA할리우드 차병원의 경우, 응급실에 보안팀 인력이 1명 이상 상시 상주하고 있으며, 폭행 사태(코드 그레이)가 발생하거나 살상 무기가 발견(코드 실버)되면 보안팀이 추가로 배치되고 주 경찰이 출동하는 등 관련 매뉴얼이 잘 준비돼 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일부 지역에선 응급실 출입구에서 공항처럼 소지품을 일일이 체크하는 등 응급실 폭행을 막기 위한 환경 구축이 잘 이뤄져 있다.
워라벨 차원에서도 이점이 많다. 김보라 CPO는 "미국에선 응급실 의사가 일주일에 3일만 일해도 많이 일하는 편이다. 한국에선 대학병원 교수들이 외래를 볼 때 하루에 100명씩도 보는 것이 다반사지만 미국에선 환자 10명이 평균"이라며 "적절한 수가 보상과 폭행 방지 등이 의료진 이탈과 번아웃을 막는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중증 응급환자 52%, 응급실에 제때 못온다
반면 최근 국내 응급의료 시스템은 위기 상황이다. 특히 중증 응급환자가 응급실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다. 국립중앙의료원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중증 응급환자의 적정 시간 내 미도착 비율은 47.2%에 그쳤으나 2020년 48.4%로 증가하더니 2021년엔 50.8%, 2022년엔 52.1%로 크게 늘었다.
응급환자들이 응급실을 제때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론 ▲응급실의 경증환자 과다현상, ▲인력부족이 꼽힌다.
특히 경증환자 과밀화 현상이 심각한데, 응급실 내원환자 중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기준(KTAS) 4~5 레벨의 경증 손상 환자가 74%에 달할 정도다(2021년 응급의료통계연보). 반대로 KTAS 1~2 레벨의 중증 손상 환자는 3.6%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응급실에 온 환자 중 입원이 아닌 귀가 조치 당하는 환자가 71.7%에 육박한다.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2022년 응급의료기관 이용 환자 중 응급진료 결과 전원 조치된 환자 수를 살펴보면, 지난해 응급실에 환자가 내원한 경우가 769만4473건이고 이 중 1.7%인 12만7355건이 전원 조치됐다.
전원 조치 중 48.8%(6만2203건)가 ‘처치 불가’ 때문이었는데 이 중 가장 많은 74.3%(4만6233건)가 의료인력(시설·장비 포함)이 부족해 전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응급실 이용자 대비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를 봐도 인력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다. 2021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전국의 응급의료기관 이용자 수는 724만869명이고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약1600명)를 계산하면 의사 1인이 4407명의 환자를 담당한 셈이다.
2017년 보고된 '국내 응급의학과 전문의 인력 및 업무량 분석' 연구에서도 지역 응급의료기관, 일반 응급실, 비수련병원, 시 지역의 응급실에서는 기관당 평균 전문의 수와 인력규모(FTE)의 비율이 1 미만으로 조사돼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순천향대병원 박준범 응급의학과 교수는 해당 연구에서 "내원 환자를 고려한 경우 기관당 평균 전문의 수와 FTE의 비율이 0.74로 계산돼 응급실 의사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업무 자체의 난이도와 강도, 야간 근무에 대한 가중치 등을 고려하면 그 비율이 더 낮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응급의학과 탈출 행렬 가속화된다…‘폭행’에 ‘형사처벌’까지 이중고 여전
더욱이 이 같은 응급실 인력 부족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은 2021년 100%였으나 2022년 93%로 떨어지더니 2023년엔 85%까지 추락했다.
응급실 탈출 조짐은 현재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다. 탈 필수의료 행렬이 응급실까지 퍼진 셈이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에 따르면 2023년 올해에만 30여명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응급실을 떠나 개업을 하거나 타 직역으로 이탈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 사이에선 '응급실 내 폭행'과 '응급의학과 의사의 형사처벌' 사례가 늘어나면서 응급실 이탈이 더욱 가속화됐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4월에도 인천 소재 모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에 입원한 주취환자가 응급실 의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응급실 내 의료인에 대한 폭행은 꾸준히 발생 중이다.
실제로 최근 5년간 국내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폭행 등 범죄는 총 9623건으로, 연평균 2000건 정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응급실 내에서 의료진과 종사자를 폭행·협박하는 등 응급의료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피의자는 최근 5년간 2610명에 이른다.
응급의학과 의사의 형사처벌 문제는 더 심각하다. 최근 서울 모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의사는 전공의 시절 대동맥박리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를 경증의 급성위염으로 오진했다는 이유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환자에게 발생한 악결과의 책임을 응급실 의사에게 전가하는 것은 응급의료의 특수성을 모르는 판결이며 이대론 더 이상 응급환자를 제대로 진료할 수 없다"면서 "응급의료현장의 전문의들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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